이행원 신도비

□ 소 재 지 : 서종면 수릉리 산2-1
□ 시     대 : 조선 철종 13년(1862) 건립
 
   서종면 소재지에서 2번 국도를 타고 동쪽으로 2km 가면 오른쪽으로 1번 국도가 나오는데 이 길을 따라 500m 들어간 왼편 언덕에 이행원 신도비가 있다.
   이행원(李行遠, 1592~1648)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사치(士致), 호는 서화(西華)이다. 신계현령 이중기(李重基)의 아들로 서종면 수입리에서 성장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기량이 넓어 많은 사람들이 큰 그릇으로 지목하였다고 한다. 1617년(광해군 9)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正字) ․ 박사(博士)를 거쳤다. 1623년 인조반정후 문장이 왕에게 인정되어 주서로 들어가 왕이 내리는 전교와 교유문을 거의 말아서 지었다. 이어서 홍문관 교리로 발탁되었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최명길(崔鳴吉) 등의 화의론에 반대하여 척화를 주장하였다. 그 뒤 화의가 성립되자 부빈객(副賓客)이 되어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인질로 잡혀가는 길을 심양(瀋陽)까지 호종하여 고초를 함께 겪었다. 심양에서 돌아온 뒤에는 대사헌을 지내고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647년(인조 25) 우의정에 오르고 이듬해 사신이 되어 청나라로 들어가던 도중 병을 얻어 평안도 의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림을 잘 그리고, 글씨에 뛰어났다고 한다. 지방관으로 나갔을 때 민심을 무마하고 세금을 격감하는 등 치적이 많았으며, 일생을 가난하게 지냈으므로 청백리에 뽑혔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신도비(전체높이 259cm, 폭 60cm, 두께 32.5cm)의 비신은 오석으로 앞면에 비문이 있으며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전면의 비제는 “朝鮮仁廟朝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監春秋館事孝貞西華 李公神道碑銘” 이다.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찬하고, 통일신라시대의 서예가인 김생(金生)의 글씨를 모아 새겼다. 옥개석은 팔작지붕 형태로 처마가 날렵한 감을 주며 처마 밑의 서까래 표현이 우수하다. 비좌는 백색 화강암으로 상부를 말각하여 놓았다. 전체적으로 신도비치고는 소형이지만 비좌가 안정감 있게 받치고 있어 균형이 잡혀 있는 편이다. 비는 원래 안산 끝 동국임방 경좌갑향에 있었으나 비 앞에 교회건물이 들어서 앞을 가리게 되어 1998년 이곳에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묘는 서종면 수입리 전의 이씨 선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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