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산사지

(蘆山祠址)
 □ 소  재 지 : 서종면 노문리 산69-7
 □ 시      대 : 1954년 창건
 □ 지정사항 : 경기도 기념물 제43호
 
   서종면소재지에서 363번 도로를 타고 청평쪽으로 5.5km 가다가 다시 오른쪽 86번 도로를 타고 5.5km 가면 노문초등학교가 나온다. 여기서 10번 도로를 타고 1km 가면 오른쪽으로 노문리 벽계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에는 이항로가 생전에 장회진, 양헌수, 김평묵, 박문일, 유중교, 최익현, 유인석, 박장호 등 많은 선비들을 가르치던 생가가 있고, 노산사지는 생가에서 동쪽으로 약 50m 정도 떨어진 야산 언덕 위에 정남향으로 있다.
   노산사는 이항로의 높은 학행을 기리기 위하여 1954년에 유림들에 의해 현재의 사우가 창건되었다. 주자(朱子)를 주향으로 하고, 동쪽에는 송시열(宋時烈)을, 서쪽에는 이항로를 배향하였다. 배향인물인 이항로(李恒老, 1792~1868)는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로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이며, 본관은 벽진(碧珍)으로 이회장(李晦章)과 전의 이씨 사이의 외아들로 벽계(蘗溪)에서 태어났다. 화서(華西)라는 호는 그가 살던 벽계마을이 청화산(靑華山) 서쪽 10여 리에 위치한 관계로 문하들이 ‘화서선생(華西先生)’ 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이항로는 1808년(순조 8)에 반시를 보러 갔다가 당시 권력층에 있던 고관이 과거급제를 구실로 자기 자식과 친분 맺기를 종용하자 이에 격분하여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 후 학문에만 전념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힘을 쏟았다. 그 뒤 그의 학덕이 알려져 1840년(현종 6) 휘경원(徽慶圓)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향리에서 강학을 위하여 여숙강규(閭塾講規)를 제정하여 실시하였다. 이 무렵 한말의 위정척사론자로 유명한 최익현(崔益鉉) ․ 김평묵(金平黙) ․ 유중교(柳重敎) 등이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칠십이 넘은 노령으로 입궐하여 주전론을 적극 주장하였으며, 이어 공조참판으로 승진되고 경영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상소 사직하였다.
   그는 성리학자일 뿐 아니라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염려한 우국지사로서 그의 문하에서 위정척사운동의 중심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며, 문집으로는 『화서집(華西集)』이 있다. 묘는 서종면 정배리 통점골에서 2004년 3월 노문리 벽계 뒷산으로 이장하였다. 현재의 노산사는 경내 264㎡ 규모로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이다. 전면에 제월대와 묘정비 및 기념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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