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곡서원

(水谷書院)
 □ 소  재 지 : 지평면 수곡리 633
 □ 시      대 : 조선 고종 11년(1874)
 □ 지정사항 : 양평군 향토유적 제20호
 
   지평면소재지에서 70번 도로를 따라 여주 방면으로 7km 가다가 4번 도로를 따라 북으로 2km 가면 수곡리 안골마을로 가는 길이 나온다. 수곡서원은 이 길을 따라 800m 들어간 안골마을 뒤편의 능선 아랫부분에 자리잡고 있다.
   이 서원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피화한 문신 권경우(權景祐) ․ 권경유(權景裕) 형제를 제향한 서원이다. 처음부터 서원이 건립되어 제향된 것이 아니라 1714년(숙종 40)에 사람들이 권경유의 향현사를 건립하고 제향하다가 1798년(정조 22) 지평유색 민성유(閔聖游) 등 29인이 조정에 상소하여 신변, 조형생, 조문형이 제향된 향현사에 권경우가 특명으로 제향되었다(『수곡서원지』). 그러다가 1871년(고종 8)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으로 향현사가 훼철되자 조규호(趙奎鎬) 등이 통문을 돌려 유림 314명과 함께 의논하여 권경우와 그의 동생 권경유를 별도로 사우를 건립하여 제향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권경유의 향현사 터에 1922년 5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930년 10월에 준공하였다. 의친왕이 “水谷書院”이라는 현액을 써서 내렸다(『수곡서원지』). 1966년에 단청을 했으며, 1967년 기와보수, 1971년 내삼문 보수, 1976년 내삼문을 보수하였다.
   서원은 전학후묘형으로 강당이 앞에 있고, 그 뒤쪽에 사우를 두었다. 수곡서원이란 제액이 달린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로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가진 초익공의 집으로 한식 골기와를 얹었으며, 좌우측면에 방풍판을 달았다. 강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중간에 마루를 깔고 좌우측에는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의친왕의 친필인 “誠儆齋”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서원 서쪽으로 권경우의 묘와 신도비가 인접해 있다.
 
*수곡서원 제향인물
 
① 권경우(權景祐, 1448~1501)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수(子綏)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판관 권질(權耋)의 아들이며, 대사헌 권경희(權景禧)와 이조정랑 권경유(權景裕)의 형이다. 1470년(성종 1)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봉교(奉敎) 등을 거쳐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통사(通事) 조종손(趙宗孫) 등의 밀무역을 검찰한 공으로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이어서 홍문관 수찬(修撰), 제주 경차관(濟州 敬差官), 사간원 정언을 거쳐 1482년(성종 13) 홍문관 부교리로 있을 때 폐비 윤씨를 폐위시킨 잘못에 대하여 간언하다 파직 당하였다. 그 후 1484년(성종 15) 조부 상을 당하자 이곳에 월산리에서 시묘살이를 하면서 안동 권씨 입향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족보에 의하면 권경우가 이 동네에 오자 명사 41명이 모여 계첩(향약)을 맺어 활발히 학문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그 후 1486년(성종 17)에 공조 ․ 예조정랑에 복직된 후 봉상시 첨정, 사간원 사간을 거쳤다. 1491년(성종 22) 흥문관 전한(典翰)으로 있을 때,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종사관이 되어 역적을 토벌한 공으로 중훈대부로 품계가 올려졌다. 1492년(성종 23) 형조참의가 된 후, 부제학, 동부승지, 도승지, 경기도 관찰사,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498년(연산군 4) 사헌부 대사헌에 올랐으나 그 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동생 권경유(權景裕)가 주모자로 처형되자 이에 연루되어 그도 강릉부(江陵府) 관노(官奴)로 배속되었다. 중종반정으로 신원되고 적몰되었던 가산도 환급되었다.
 ② 권경유(權景裕, ?~1498)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군요(君饒) ․ 자범(子凡), 호는 치헌(痴軒)으로 권경우의 동생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남효온(南孝溫), 김일손(金馹孫) 등과 교유하였다. 1485년(성종 16)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홍문관 정자를 거쳐, 1490년(성종 21)에는 독서당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하였다. 여러 차례 천거되어 교리에 이르렀으며, 1495년(연산군 1)에는 연산군의 폭정이 심해지자 외직을 청하여 제천현감이 되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다. 1506년 중종반정 후 도승지에 추증되었으며, 1798년(정조 22) 부제학에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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