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행건 신도비

□ 소 재 지 : 서종면 수입리 산9-1
□ 시     대 : 조선 숙종 24년(1698) 건립
 
   서종면소재지에서 363번 도로를 따라 가평군 외서면 방향으로 6km 정도 가면 오른쪽으로 86번 국도가 나오는데 이 길을 따라 1km 정도 가면 오른쪽으로 수입리 내수입마을 진입로가 나온다. 이행건 신도비는 그 길을 따라 1km 정도 더 들어간 전의 이씨 선산 길변에 있다.
   이행건(李行健, 1588~1654)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사이(士以) 호는 기곡(箕谷), 현령 이중기(李重基)의 아들이자 이행원의 형이며, 이만웅의 아버지이다. 1612년(광해군 4) 생원 ․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당시 종조부 이경준(李耕俊)이 계축옥사와 관련하여 세상을 떠나자 부모를 모시고 양평으로 낙향하여 은둔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벼슬길에 올라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가 되었다가 상을 당하여 동생 이행원(李行遠)과 함께 양평으로 돌아와 시묘살이를 하였다. 1628년(인조 6)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司諫阮) 정언(正言)이 되었다. 1630년 선조의 능인 목릉(穆陵) 땅이 불길하다고 주장하였던 원주목사 심명세를 옹호하다가 사간원에서 해임되고 개성부 경력의 외직으로 나아갔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나한산성으로 들어가 독전어사(督戰御使)로 선임되었으며 난이 끝나자 왕을 호위한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다. 이후 동부승지를 거쳐 좌승지, 공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세상을 떠난 후 소무원종공신(昭武原從功臣)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신도비(전체높이 218cm, 폭 56cm, 두께 19.5cm)의 비신은 백색 대리석으로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찬하고, 형인 이행원의 사위 유상운(柳尙運)이 글씨를 쓰고 손자인 이징하(李徵夏)가 전액을 썼다. 비를 1681년 완성하고자 했으나 이루지를 못하고, 다시 18년이 지난 1698년(숙종 24)에야 손자 이징명(李徵明)이 경기도관찰사가 되어 완성했다고 비문 말미에 밝히고 있다.
   신도비치고는 전체적으로 소형이며 비신의 규모에 비해 안상문과 복련문 있는 화려한 비좌와 둔중한 옥개석이 커서 균형이 안 맞는 편이다. 묘는 서종면 수입리 전의 이씨 선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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