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영 신도비

 □ 소 재 지 : 용문면 삼성리 산142-1
 □ 시     대 : 조선시대
 
   용문면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약 4km 정도 가면 삼성교에 이르는데, 여기에서 6번 군도를 따라 다시 4km 정도 가면 삼성리 등골마을에 이른다. 성영 신도비는 삼성리 등골마을 내의 양어장과 등골낚시터의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약 600m 정도 가면 계곡의 개울변 옆에 있다.
   성 영(成泳, 1547~1623)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사함(士涵), 호는 우천(愚川), 태정(苔庭)이다. 강원도 관찰사 성세평(成世平)의 아들이고, 영의정 이양원(李陽元)의 사위이다.
   여주군 홍천면 대복리에서 성장한 성영은 1573년(선조 6) 문과에 급제하였다. 1576년 사헌부감찰을 거쳐 의정부사인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모친상을 당하자 지평현(양평군 용문면 삼성리)에 안장하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1592년 여주목사가 되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도순찰사로서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참전했으며 이듬해 경기좌도관찰사 겸개성유수로 임명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정양향사(南征糧餉使)로서 군량미 조달을 담당하였다. 1599년 공조참판 ․ 한성부좌윤을 거쳐 대사헌 ․ 예조참판 ․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으며 이듬해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1601년 한성부판윤이 되고 1602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서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예 다녀왔다. 1608년(광해군 8) 연일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인조반정 후 복관되었고 시호는 양혜(襄惠)이다.
   신도비(전체높이 161cm, 폭 62cm, 두께 32cm)는 팔작지붕으로 자연암석 위에 대리석 비신을 세웠다. 신도비문은 대사헌 남태저(南泰箸)가 짓고 홍문관교리 임희우(任希雨)가 썼으며, 엄도(嚴擣)가 전했다. 전 ․ 후 면에 걸쳐 횡으로 “朝鮮國 吏曹判書 成公神道碑名”의 전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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