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원 신도비

 □ 소 재 지 : 강하면 전수리 산220-1
 □ 시     대 : 조선 영조 28년(1752) 건립
 
   강하면소재지에서 성덕리 방향으로 난 길로 1.5km 가다보면 강하면 전수리의 벽돌공장이 나온다. 김이원 신도비는 이 공장 뒤의 구릉 아래쪽에 있다.
   김이원(金履元, 1553~1614)은 조건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수백(守伯), 호는 소암(素菴)이다. 일선위 김극빈의 아버 지로 선조의 아홉째 딸인 정근옹주(貞謹翁主)가 며느리이다. 1583년(선조 16)의 문과에 급제한 후 호조좌랑 ․ 수찬 ․ 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93년(선조 26) 의주목사(義州牧使)로 부임하였을 때 전국적으로 심한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백성들이 많았는데, 의주읍만은 명나라로부터 곡식을 들여왔기 때문에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할 수 있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는데, 선임자 유희서(柳熙緖)가 명나라 군사에게 모욕을 받고 사임한 까닭에 모두 그를 걱정하였으나 명나라 병사들을 잘 다루어 경기도내 행정을 바로 잡았다. 1612년(광해군 4) 계축옥사를 잘 다스렸다 하여 익사공신(翼社功臣)에 오르고, 숭양부원군(嵩陽府院君)에 봉해졌다. 이후 병조판서 ․ 판중추부사에 이르렀으나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훈작이 추탈되었다.
   신도비(전체높이 223cm, 폭 상 68cm ․ 하 66cm, 두께 24cm)는 이현석(李玄錫)이 글을 짓고, 이광사(李匡師)가 글씨를 써서 1752년(영조 28) 건립되었다. 전체적으로 비좌와 이수의 구모에 비해 비신이 작은 편이다.
비신과 이수는 하나의 돌이며, 비신은 검게 산화되었다. 전 ․ 좌 ․ 우면은 마모되어 일부만 알아 볼 수 있는 반면, 후면은 비교적 뚜렷하다. 전면 상단에 “朝鮮國贈領議政行兵”, 후면 상단에 “曹判書金公神道碑名”이라 전액했다. 이수는 구름 문양 속에 두 마리 용이 서로 앞발을 들어 움켜잡고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 비좌는 전 ․ 좌면에 두 개식의 안상문이 있고, 우 ․ 후면은 마모되어서인지 아무런 무늬가 없다. 비좌  상부는 복련문을 화려하게 조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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