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사 당상계불량비

 □ 시    대 : 조선시대(1773)
 
   이 비는 사나사 경내에서 조금 벗어난 절 입구 쪽에 있다. 자연석 암반을 다듬어 홈을 판 뒤 그 위에 비신을 세웠는데 원위치를 지키고 있다고 판단된다. 1916년에 실시된 『대정5년도 고적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조사 당시에는 비석이 비각 안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현재는 노천(露天)에 서 있다.
   비신을 덮고 있는 덮개돌은 화강암이며 조선 후기에 널리 유행한 석비의 형식으로 지붕모양을 닮은 개석(蓋石)인 가첨석(加襜?)이다.
   비신은 회청색(灰靑色)의 굳은 화강암이며 4면 모두 잘 연마하여 글자를 새기고 있다. 곳곳에 탄흔(彈痕)을 비롯하여 파손이 있고, 또 몇몇 곳에는 균열이 심하여 무너질 위험도 있어 보존을 위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하겠다.
   비양에 새겨져 있는 비문은 모두 12행이나 글자 수는 일정하지 않다. 비문은 떨어져 나간 부분도 있어 모두 판독하기는 불가능하지만 그 내용은 대략 파악할 수 있다. 군내(郡內)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당상(堂上) 이상의 품계를 받은 사람들이 당상계(堂上稧)를 조직하여 사나사의 영세불공(永世佛供)을 위해 불량답(佛糧畓)을 시주하고 그 일을 기념하여 비석을 세운 것이라 한다.
   비신에 새겨진 기록에 따르면 비는 “乾隆四十年乙未八月”에 세웠다고 한다. ‘건륭40년을미’는 1775년(영조 51)이다. 조선 후기에 세워진 이 비는 단지 사찰에 관련된 자료를 넘어 당시 지방사회의 사회상이나 경제면, 그리고 신앙적인 면을 연구하는 데도 귀중한 자료라 생각된다.
   비의 크기는 비신 높이 150cm, 너비 65cm, 두께 20cm이며, 개석은 높이 60cm, 너비 100cm, 두께 60cm이고, 비석의 받침돌인 자연암반은 대략 180X110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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