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이씨지동세장지비

(德水李氏砥東世蔣之碑)
 □ 소 재 지 : 양동면 쌍학리 314
 □ 시     대 : 조선 영조 25년(1749) 건립
 
   양동면소재지에서 319번 도로를 따라 1km 가면 오른쪽으로 쌍학리 안골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다시 1km 정도 들어가면 안골마을이 나오는데 덕수이씨 지동세장지비는 마을 입구 길가에 있다.
   덕수이씨 지동세장지비(전체높이 146cm, 폭 58.5cm, 두께 25.5cm)는 1749년(영조 25)에 세운 것으로, 택당(澤堂) 이 식(李植)이 지평에 정착한 이후 덕수 이씨 가문에서 배출한 인물들의 묘소 위치를 기록한 것이다. 이 식의 증손인 이기진(李箕鎭)이 비무을 짓고, 외증손 사위 김진상(金鎭商, 1684~1755)이 글씨를 썼다.
   덕수이씨는 1618년(광해군 10)에 이 식이 인목대비의 폐비에 반대하여 지평(砥平, 현재의 양동면)으로 낙향하여 남한강변에 택풍당(澤風堂)을 짓고 은거하게 되면서 이 지역에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덕수 이씨 지동세장지비에는 덕수 이씨의 시조로부터 13세 이하, 즉 이식의 조부와 아버지, 아들, 손자때까지의 묘소 위치가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기록된 인물들 가운데 지평에서 사창을 실시한 이단하(李端夏, 1625~1689)와 영의정을 지낸 이 여(李畬, 1645~1718), 비문을 작성한 이기진(李箕鎭, 1687~1755) 등이 특히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단하(李端夏, 1625~1689)는 이식의 셋째아들로 호는 외재(畏齋) ․ 송간(松磵)이다. 1662년(현종 3)에 문과에 급제한 후 정언, 용안현감, 이조정랑, 경서교정청 교정관, 동부승지, 이조참의 등을 거쳐 1674년(현종 15)에는 대사성으로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이어 숙종이 즉위한 뒤 서인으로서 제2차 복상문제로 숙청당한 의례제신(議禮諸臣) 처벌의 부당성을 상소하다가 파직, 이듬해 삭직당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다시 벼슬길에 올라 이듬해 『현종개수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특히 그는 고향인 이곳 양평(지평)에서 사창을 실시한 경험을 바탕으로 사창제도를 철저히 실시하여 굶주리는 백성을 돌볼 것을 역설하였는데 1684년(숙종 10) 예조판서가 되어 「사창절목(社倉節目)」을 만들었고, 1686년(숙종 12) 우의정이 되어 사창설치의 다섯 가지 이익을 건의하였다.
   이 여(李畬, 1645~1718)는 이 식의 차남인 이신하의 둘째아들로 호는 수곡(睡谷) ․ 수촌(睡村) ․ 포음(蒲陰)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1680년(숙종 6)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예문관 검열(檢閱), 홍문관 정자(正字) ․ 승지, 부제학 등을 역임하다가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과 함께 면직되었다. 1694년(숙종 20) 가술옥사(甲戌獄事)로 남인이 물러나자 형조참판에 기용되었다. 이후 사간원 대사간을 시작으로 1696년(숙종 22) 성균관 대사성 ․ 한성부 판윤을 지냈으며, 이듬해 사헌부 대사헌 ․ 이조판서 ․ 대제학을 역임하였고, 1703년(숙종 27)에는 판의금부사로 재직하면서 옥사를 엄정하게 다스려 이름을 떨쳤다. 1703년(숙종 29) 좌의정에 제수되었고 1710년(숙종 36) 영의정에 올랐으며, 이후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이기진(李箕鎭, 1687~1755)은 이 식의 증손이고 호는 목곡(牧谷)이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으로 1717년(숙종 43)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 홍문관에서 재직하였다. 1721년(경종 1) 헌납으로 있을 때,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된 연잉군(뒤의 영조)에 대하여 나쁜 마을 퍼뜨린 유봉휘(柳鳳煇)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신임사화 때 파직되엇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곧 등용되어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이듬해 시독관(侍讀官)이 되어 신임사화와 관련된 소론에 대한 시비를 명백히 밝힐 것을 극언함으로써 한때 영조의 노여움을 사기도 하였다. 1725년(영조 1)에 승지를 지냈고, 이조참의를 거쳐 1727년(영조 3)에 부제학 등을 역임하고 강화부유수가 되었으나, 왕세자의 관례 때 봉전문(封箋文)을 빠뜨린 사건으로 파면 당하였다. 그 뒤 향리에 머물고 있던 중,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 등 소론 일파다가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상경하여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며, 반란이 평정되자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후 1729년(영조 5) 재차 벼슬길에 올라 함경도관찰사, 대사간, 경상도관찰사 ․ 형조판서 ․ 경기도관찰사 ․ 판의금부사 ․ 이조판서 ․ 홍주목사 ․ 평안도관찰사 등을 두루 역임했으며, 1749년(영조 25)에 덕수이씨 세장지비를 세우는 한편 족형인 이태진(李泰鎭), 이도진(李道鎭) 등과 함께 종약을 제정하여 종족간의 화의를 돈독하게 하는데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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