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경우(權景祐) 묘 및 신도비


 □ 소 재 지 : 지평면 수곡리 633-3
 □ 시     대 : 신도비-조선 고종 12년(1875) 건립
 
   지평면소재지에서 70번 도로를 따라 여주 방면으로 7km 정도 가서 북쪽으로 4번 도로를 타고 2km 가면 수곡리 안골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800m 들어가면 안골마을이 나오는데 권경우의 신도비는 마을 뒤편 능선 아래쪽에 위치해 있고, 묘소는 능선을 따라 약 50m 정도 올라간 곳에 조성되어 있다.
   권경우(權景祐, 1448~1501)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수(子綏)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판관 권 질(權耋)의 아들로 1470년(성종 1)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었으며 뒤에 예문관 봉교(奉敎)로 승진하였다. 이듬해에는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통사(通事) 조종손(趙宗孫) 등의 밀무역을 검찰한 공으로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이어서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제주경차관(濟州敬差官), 사간원 정언을 거쳐 1482년(성종 13) 홍문관 부교리로 있으면서 왕비 윤씨를 폐위시킨 처사의 부당함을 간언하다가 파직 당하였다. 1486년(성종 17)에 다시 공조 ․ 예조 정랑으로 복직되었으며, 형조참의, 부제학, 동부승지,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연산군 4년 사헌부 대사헌에 올랐다. 그러나 그 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동생인 권경유(權景裕)가 주모자로 처형되자 이에 연루되어 강릉부(江陵府) 관노(官奴)로 배속되었다. 중종반정으로 신원되고 압수되었던 가산(家産)도 돌려받았다.
   한편 『안동권씨족보』에 의하면, 권경우는 안동권씨의 지평 월산마을 입향조로 마을에 들어와서 향악을 실시한 것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묘소에는 동쪽으로 300m 정도 떨어진 곳에 수곡서원(水谷書院)이 있는데 1930년에 이곳에 제향되었다.
   권경우의 묘 왼쪽에는 묘비가 있고, 중앙에는 상석이 배치되었으며, 좌우에는 장명등과 망주석,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신도비(전체높이 304cm, 폭 73cm, 두께 19.5cm)는 1875년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은 허전(許傳)이 짓고, 권현(權炫)이 썼다. 이수와 장방형 대좌를 갖추고 있으며, 이수와 비신은 하나의 돌로 조성되어 있는데, 월두형인 이수부는 2마리의 용과 구름 문양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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