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손 묘역 및 석물


□ 소  재 지 : 양서면 부용리 산37-1
□ 시      대 : 신도비-조선 초 건립, 인조 1년(1623) 재건, 1970년 경기도 광주에서 이건
□ 지정사항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85호
 
   양서면소재지에서 1번 도로를 따라서 서종면 방향으로 2.5km 정도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부용리 향목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보인다. 정창손 묘역은 이 길을 따라 100m 정도 들어간 동쪽 산록에 위치한다. 마을 진입로변에는 근래 새로이 세워진 신도비가 있고 조금 더 들어간 곳에 1623년(인조 1)에 재건한 신도비와 비각이 있다.
   정창손(鄭昌孫, 1402~1487)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효중(孝仲), 호는 동산(東山),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중추원사(中樞院事) 정흠지(鄭欽之)의 아들이다. 1426년(세종 8)에 문과에 급제한 후 집현전의 저작랑(著作郞)과 교리를 역임하였다. 1443년(세종 25) 집현전 응교(應敎)가 되어 한글 창제에 반대하다가 파직, 투옥되기도 하였고 세종의 불경사업에 반대하여 좌천되기도 하였다. 1447년(세종 29) 문과중시에 등재한 후 집현전 부제학으로 춘추관편수관 수사관을 겸직하면서 『고려사』, 『세종실록』, 『치평요람(治平要覽)』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문종 때에는 대사헌, 대제학, 병조판서를 지내며 『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53년(단종 1) 이조판서, 1455년(세조 1) 좌찬성으로 이조판서를 겸했으며, 좌익공신(左翼功臣) 3등에 녹훈되고 봉원군(蓬愿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성삼문, 박팽년의 단종복위 음모를 고변한 공으로 좌익공신(左翼功臣) 2등에 올랐고,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 되었다. 1457년(세조 4)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1468년 예종 즉위 후 남이(南怡), 강순(康純)의 옥사를 다스려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이 되었다.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이 되었으며 1472년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이 되고 1475년(성종 6)에 다시 영의정을 지냈다. 정창손은 1485(성종 16)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3대에서 15년간 영의정을 역임하였으며 그가 세상을 떠나자 왕은 청빈재상(淸貧宰相)이라 하여 부의를 후사(厚賜)하였다. 그 후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의 폐비론에 참가한 죄로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으나, 1506년(중종 9)에 신원되고, 1514년(중종 9)에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성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정창손의 묘역은 신도비에 의하면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하면서 신도비와 함께 파괴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신원이 복귀되면서 신도비를 제외하고 다시 건립하였다고 한다. 묘는 원래 경기도 광주 방제동에 있었던 것으로 도시개발로 1970년에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새로 조성한 것으로 부인묘와 하나의 봉분으로 합장하고 이전의 석물과 새로운 석물을 함께 배치하였다. 묘의 좌측에 부인묘비와 정창손의 묘비가 있고 묘의 좌우에는 2조의 문인석을 배치하였는데 상석과 망부석, 장명등, 동물석상은 근래에 제작된 것이다.
   신도비(높이 186.5cm, 폭 73cm, 두께 24.5cm)는 이수가 없는 월두형(月頭形)으로 원래 서거정이 1488년(성종 19)에 지었으나, 파괴되었던 것을 개장(改葬) 때 외손 이원익(李元翼)을 중심으로 이시언(李時彦), 심 열(沈悅), 최명길(崔鳴吉) 등이 1623년(인조 1)에 재건하였다. 비문은 정창손의 외후손인 한준겸(韓浚謙)이 추찬(追撰)하고, 역시 외후손인 심 열(沈悅)이 글씨를 썼고 전(篆)하였는데 정창손의 연대기와 신도비가 파쇄된 후 다시 건립된 사정 등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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