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평리 고분군

   대평리 대평저수지의 북쪽에 접해 있는 산지의 남쪽 능선상에 위치한다. 대평저수지와 야산 사이로 통과하는 지방도로변의 독립가옥에서 북쪽 산지로 약 50m 정도 올라가면 수목이 우거져 있는 봉토분 1기가 있고 여기에서 다시 북쪽으로 능선을 따라 약 50m 정도 올라가면 봉토분 1기가 있다. 현재 확인되는 고분은 2기뿐이다. 이 일대는 양평군의 동쪽 산지로서 골짜기가 좁고 사방이 높은 산지로 막혀 입지조건이 좋은 곳은 아니다. 그러나 서쪽으로 약 1km 정도 가면 남한강의 지류인 곡수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고 이 천변에는 비교적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이러한 입지조건으로 보아 고분축조집단은 곡수천변을 생활무대로 한 것으로 판단된다. 북쪽에 있는 것을 1호분, 남쪽에 있는 것을 2호분이라 하고 기술하면 아래와 같다.
  
   1호분은 해발 125~130m 정도 되는 능선 정상부에 위치하는 횡혈식석실분이다. 북고남저의 자리에 위치한 관계로 봉토의 남쪽면은 급경사를 이루고 북쪽부분은 경사가 완만하게 산지의 정상부쪽과 연결된다. 이것은 경사면을 ‘ㄴ’자상으로 파서 매장주체부를 만듦으로써 봉토 축조시 성토량을 줄이면서 봉토를 보다 높게 보이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봉토는 저경이 남북 11.6m, 높이 0.8(북)~2.1m(남)정도이다. 봉토에는 지름이 10~4.cm정도 되는 소나무와 참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봉토 상부에는 가운데에 사람이 아래로 내려갈 수 있을 크기의 도굴공이 뚫려 있다. 남쪽과 서쪽의 봉토 가장자리를 따라 호석이 관찰되는데 현재 길이 10m정도에 걸쳐 길이 40~100cm, 높이 20~30cm 정도 되는 화강암이 1~2단정도로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 부분의 아래인 급경사면에 호석보다는 작은 돌들이 계단상으로 최고 4단 정도에 걸쳐 등고선 방향을 따라 관찰되는데 묘역을 조성하기 위한 축대로 판단된다.
   바깥에서 관찰되는 도굴공은 현실 북벽 최상부에 뚫려 있는데 이를 통해 흘러 들어온 낙엽과 흙이 석실바닥에서 위로 가면서 원추형으로 쌓여 있다. 현실은 주축이 남북방향(N-15-W)이고 평면 형태가 방형으로 동서 255cm, 남북 265cm, 높이는 본래의 바닥에 가까운 곳으로 추정되는 남벽 직하를 기준으로 약 230cm정도이다. 대충 다듬은 할석을 반듯한 면이 안쪽으로 오도록 눕혀 쌓아 네 벽을 만들었는데 바닥에서 높이 90~100cm까지, 즉 4~5단까지는 수직으로, 그 위는 내경되게 쌓았다. 벽석 상하에 점토를 깔았던 곳이 부분적으로 관찰되며 벽석사이의 틈은 작은 돌로 메꾸었다. 사용된 벽석은 크기가 길이 40~50cm, 높이 20~30cm정도이다, 현실 평면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내결되게 쌓아 좁아진 벽의 최상단에는 아래 면이 편평한 한 장의 화강암으로 덮었다. 천장석이 네 벽 모두에 걸친 것이 아니라 동서 벽 위에 얹혀져 있고 남북 벽에는 그냥 붙여 있는 상태이다. 내부에서 관찰한 천장석의 크기는 동서 110cm, 남북 120cm정도이다.
   남벽의 서단부에 현문이 있다. 문틀은 높이 70cm, 두께 35~40cm, 폭 10~20cm정도 되는 긴 화강암을 90cm의 간격을 두고 세우고 그 위에 길이 110cm, 두께 50cm정도 되는 긴 화강암을 걸쳐 놓았다. 이 문틀의 바깥쪽에 접해 폭 55cm, 높이 70cm, 두게 25cm 정도 되는 다듬은 화강암 1장을 세워 문으로 삼았다. 현문 바깥쪽으로 연도가 이어져 있는데 현실의 서벽이 연도의 서벽과 이어지는 형태이며 문주석만 튀어나와 있다. 연도의 벽은 현실의 벽석보다는 약간 작은 할석을 5단 정도로 눕혀 쌓았으며 높이는 80cm이다. 연도의 천장석은 아랫면이 편평한 여러 장의 화강암으로 덮였다. 연도 끝 부분으로 보이는 곳에 현실과 연도의 벽석과 비슷한 크기의 할석이 군을 이루고 있는데 현문에서 폐쇄석까지의 거리는 약 130cm정도이다.
 
   2호분은 1호분에서 남쪽으로 약 50m정도 떨어진 능선말단 정상부에 위치한다. 바로 남쪽아래에 동서방향으로 지방도로가 지나가고 그 아래에 대평저수지가 있다. 봉토상에는 직경 30cm정도 되는 참나무와 잡목이 우거져 있다. 정상부는 유실 ․ 삭평되고 동서방향으로 도굴된 흔적이 있다. 봉토는 평면 원형으로 저경이 대략 17m, 높이는 2(북)~3.8m(남)정도이다. 봉토의 남쪽 자락에 호석이 관찰되는데 길이 40~80cm, 높이 20~30cm정도 되는 돌들이 약 8m의 범위에 걸쳐 원주상으로 분포하고 있다.
   출토유물이 없어 고분군의 축조연대와 성격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내부구조를 알 수 있는 1호분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평리1호분은 기본적으로 축조수법에서 신라지역의 석실들과 많이 유사하다. 특히 천장부의 내경곡선이 대단히 완만하여 호형이라기보다는 완만한 사선에 가깝고 천개석이 넓게 덮여 있는 점, 천개석 바로 밑까지 4우각(隅角)이 분면하며 천장부분도 동서남북 벽이 구분되어 천장부분의 평면 역시 석실의 평면 형태와 대동소이한 점 등이 그러하다.
   축조연대는 대평리1호분의 문틀 구조 등으로 보아 같은 신라 석실분인 가락동 ․ 방이동석실분보다 늦은 시기로 생각하며, 가락동 ․ 방이동 석실분은 출토된 토기들로 보아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한 6세기 중엽 이후의 석실로 판단된다. 이러한 연대관에서 본다면 대평리1호분은 대략 7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평리 고분군은 양평군 일대에서 조사된 예가 없는, 학술적으로 중요한 횡혈식석실분이다. 현재 도굴로 석실 일부가 파손되고 도굴공을 통해 흙, 낙엽 등이 유입되고 유수에 의해 침식됨에 따라 파괴될 가능성이 있다. 고분군의 범위 확인을 위한 주변지역에 대한 정밀지표조사와 함께 발굴을 하여 성격과 연대를 밝힌 후 정비 복원하여 교육의 장으로 보존,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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