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수리 선사유적

   양수리는 원래 육지와 붙어 있는 강안 충적대지상의 사취지역이었는데 팔당댐 건설로 한강의 수위가 높아지자 섬처럼 떨어지게 되었다. 현재 양수리 섬 전지역에서 선사시대 유물이 지표채집되고 있어 하남 미사리와 같은 대규모 선사유적군이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에서 이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토사채취 구덩이 단면에서 청동기시대의 집자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긴급 수습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는데 주거지 단면부를 중심으로 주변지역에 대한 시굴조사 결과 11기의 청동기시대 집자리와 도랑유구 1기, 구덩이유구 1기 등이 확인되었다.
   기전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조사한 결과와 토지박물관에서 지표조사 당시 채집한 유물의 양상을 토대로 본다면 이 일대의 청동기문화가 여타의 지역과는 몇 가지 점에서 다른 양상이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석기유물 중 타제석기 혹은 석기제작과 관련되어 파생된 부산물의 비중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물론 잘 갈아 만든 석촉 혹은 석검도 보이지만 대부분의 석기들이 강돌을 얇게 깨내어 원재료를 마련한 다음 다시 부분적인 타격을 가하여 원하는 석기의 기본형태를 다듬어 내고 꼭 필요한 부분, 특히 날 부분만을 부분마연하여 석기를 만드는, 어떻게 보면 매우 경제적인 방식의 석기제작법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는 출토된 토기 중 심발형 공렬토기와 여러 가지 기형의 홍도가 절대적으로 많은 수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특히 공렬토기는 안에서 밖으로 밀어내듯 뚫어 외면에는 볼록한 돋을무늬가 생겨난 경우가 많다.
   위와 같은 양수리의 청동기유적이 갖고 있는 특징은 지금은 무엇이라 단정하기 어렵지만 앞으로 계속적인 조사와 다른 지역의 유적조사 경우를 토대로 심도 있는 검토가 필요한 사안이라 할 수 있다. 여하간 우리 나라 청동기시대 유적지 중에서 매우 상이한 양상을 보이는 유적으로서는 학술적 중요성이 매우 크다는 점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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