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욱선생 묘 및 묘갈


□ 소  재 지 : 용문면 덕촌리 산7
□ 시      대 : 조선 영조 21년(1745) 건립
□ 지정사항 : 양평군 향토유적 제26호
 
   용문면소재지에서 6번 국도를 따라 1.3km 정도 가면 용문교가 나오는데, 이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난 마을도로를 따라 2.8km 정도 들어가면 덕촌리 퇴촌마을에 이른다. 조욱의 묘와 묘갈(墓碣)은 이 마을에서 북동쪽으로 약 700m 떨어진 야산의 남쪽 구릉에 조성되어 있다.
   조 욱(趙昱, 1498~ 1557)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자는 경양(景陽), 호는 용문(龍門) ․ 세심당(洗心堂) ․ 우암(愚庵) ․ 보진재(葆眞齋)이고, 본관은 평양(平壤)이다. 판관 조수함(趙守諴)의 아들로 1516년(중종 11)에 생원 ․ 진사 양시에 합격한 후 조광조(趙光祖) ․ 김식(金湜)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스승과 연루되어 수감되었으나 나이가 어려 화를 면하였다. 이후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형인 조 성(趙晟)과 함께 삭녕(朔寧)에 있는 옛 전장(田庄)에 집을 짓고 학문을 강론하며 지냈다. 잠시 선원전(璿源殿)과 순릉(順陵) ․ 영릉(英陵)의 참봉(參奉)을 지냈으나 곧 사직하고 천하 명산을 유람하다가 48세 되던 해 지평(砥平)의 용문산에 은거하면서 평양 조씨가 지평에 입향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552년(명종 7) 성수침(成守琛) ․ 조식(趙植) 등과 함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내섬시(內贍寺) 주부(主溥)가 되었으며, 1553년(명종 10) 을묘왜변(乙卯倭變) 때는 장수현감(長水縣監)으로 있으면서 왜구의 침입을 잘 막아냈다. 그후 사직하고 다시 지평 용문산으로 돌아와 예전에 살던 집을 세심당(洗心堂)이라 하고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서경덕(徐敬德) ․  이황(李滉) ․ 김안국(金安國)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하였으며, 그의 학문이 널리 알려져 ‘용문선생(龍門先生)’ 이라 일컬어졌다. 시호는 문강(文康)이고, 저서로는 1779년(정조 3)에 발간된 『용문집(龍門集)』이 있다. 1740년(영조 16) 이조참의에 증직되었고, 1843년(헌종 9) 이조판서 겸 성균관제주로 추가 증직되었다.
   묘역에는 장대석의 호석이 돌려져 있으며, 묘 왼쪽에 묘갈이 위치해 있다. 중앙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좌우에 동자석과 망주석, 문인석 등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묘갈(높이 155cm, 폭 58cm, 두께 31cm)은 조욱의 증손인 조문형(趙門衡, 1617~1700)이 부탁하여 묘비문을 조익(趙翼)이 짓고, 이건명(李健命)이 글씨를 썼으며, 이징하(李徵夏)가 전(篆)한 것인데, 김진상(金鎭商)의 추기(追記)를 덧붙여 1745년(영조 21)에 세웠다. 비신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팔작지붕형의 옥개와 장방형의 비좌를 갖추고 있으며, 비석의 상단에는 전자(篆字)로 “有明朝鮮國龍門趙先生墓碑銘幷序”라고 새겨져 있다.
   조 욱의 묘에서 남쪽으로 1km 떨어진 덕촌리 길가에 2000년에 세워진 조욱의 신도비가 있는데, 비문은 1998년 최근덕(崔根德)이 짓고, 황재국(黃在國)이 썼다. 묘에서 남동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덕촌리 서원말에 조욱을 제향한 운계서원이 위치해 있고, 남서쪽으로 700m 정도 떨어진 곳에 세심정과 조욱이 살았다고 하는 퇴촌마을이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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