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지선생 묘


 □ 소  재 지 : 강하면 왕창리 산27
 □ 시      대 : 조선시대
 □ 지정사항 : 양평군 향토유적 제4호
 
   강하면소재지에서 88번 국도를 따라 광주방향으로 1.5km 정도 가다보면 강하면 동오리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약 2km 가면 오른쪽으로 능곡교가 나오는데 김여지의 묘는 이 다리를 지나 왼쪽 야산 연안 김씨 묘역의 앞단에 위치한다.
   김여지(金汝知, 1370~1425)는 고려말 조건 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행(子行), 호는 창주(滄州),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밀직제학(密直提學) 김도(金濤)의 아들이며 세종조의 문신인 김자지(金自知)의 동생이다. 1389년(고려 창왕1) 문과에 장원한 뒤 조선 태종 때 장령(掌令), 예문관 직제학, 사헌부 집의를 차례로 지내다가 1413년(태종 13)에 지신사(知申事)로 있으면서 고려 종실의 후손 왕걸오미(王乬狄?)의 동정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당하였다. 이듬해 다시 직제학으로 기용된 뒤 충청도 관찰사, 대사헌, 공조판서,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문란했던 호패법을 개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1425년(세종 7)에는 예조판서, 참찬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충직하고 도량이 넓은 인물로 태종, 세종대의 성세에 일익을 담당한 인물이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김여지의 묘는 부인 서계 이씨(西溪李氏), 초계 정씨(草溪鄭氏)와 함께 합장되어 있다. 형태는 사대석으로 다듬은 석재를 3단 높이로 쌓은 장방형 묘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묘 앞에는 구묘비(전체높이 102cm, 폭 40cm, 두께 17cm)와 신묘비(높이 145cm, 폭 56cm, 두께 28cm)가 나란히 서 있으며 묘 중앙에는 상석, 항로석, 문인석, 동자석 등의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구묘비는 화강암 재질로 앞면에 “議政府左參贊 諡文翼公金汝之墓”라 음각되어 있다. 뒷면의 “洪熙乙巳”라는 기명으로 보아서 1425년(세종 7)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어 조선초기 묘제 연구의 좋은 자료가 된다. 신묘비의 비문은 구묘비와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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