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사성


□ 소 재 지 : 개군면 상자포리 산41-1
□ 시    대 : 신라
□ 지정사항 : 사적 제251호
 
   파사성(婆娑城)은 양평군 개군면 상자포리와 여주군 대신면 천서리에 걸쳐있는 해발 230.5m의 파사산 정상에 축성된 포곡형의 석축산성이다. 이포나루에서 한강을 따라 2km정도 내려가면 동쪽으로 파사산이 있는데 별로 높지는 않으나 주변 일대가 모두 해발 30~40m의 낮은 평지여서 주변이 넓게 조망된다. 서쪽으로는 한강이 직선거리 600m정도여서 한강의 수계를 장악하고 강변을 따라 올라가는 37번 국도가 파사산 밑을 지나고 있어 방어에 매우 유리하다.
   파사성에 대한 문헌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나타나고 있는데 “고산성은 주의 북쪽 53리에 있다. 석축으로 둘레가 38,825척이다.”고 하였다. 위치상으로는 흡사하지만 둘레가 38,825척이면 주척으로 7.7km에 달하므로 이것은 아마 3,825척의 오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경우 영조척으로 환산하면 약 1.2km로서 현재의 규모와 흡사하다. 『동국여지지』에는 “파사성은 주의 북쪽 40리에 소재한다. 강과 인접한 작은 산의 정상부에 성이 웅거하고 있는데, 어느 때 성이 축조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본조 선조 때에 왜란을 당하여 승장 의엄이 석축 둘레 1,100보(步)로 수선하고, 성 중에 우물을 팠으나 지금 반이 퇴락하였다. 본조 유성룡의 시에 파사성의 위는 풀이 우거져 있고, 파사성의 아래는 물이 흐르네”하였다. 『여지도서』에는 “파사성은 주의 북쪽 40리에 소재한다. 강과 인접한 옛 터에 성이 있는데, 성중에는 샘이 있다. 임진왜란 후 정유년에 서애 유성룡이 황해도 승군 총섭 의엄으로 하여 증축하도록 한 지 수년이 지나 성은 누로와 군기 등을 모두 갖추게 되었는데, 그 후로 성이 무너지고 다만 평첩만이 남게 되었다.”하였다. 『경지지』(1842)에는 앞의 『여지도서』의 내용과 같다. 『여도비지』(1849~1864)에는 무비(武備) 성지(城池) 조(條)에서 “파사성은 치소의 북쪽 40리에 있다. 선조 임진 수축하였으며, 둘레 1,100보이다.”하였다. 『대동지지』와 『경기읍지』의 내용도 거의 유사하다.
   이후에 파사성에 대한 기록은 일제시대의 조사자료인 『조선고적조사보고』에서 기존의 문헌내용을 정리 및 성벽(城壁)과 문지(門地)에 대한 간단한 보고와 함께 남문지에 대한 도면과 서문지의 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와 이후에 발간된 『전국문화유적총람』에서도 거의 비슷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파사성에 얽힌 전설을 보면 신라 제5대 파사왕 때 남녀 두 장군이 내기를 하였다. 남장군이 나막신을 신고 중국에 다녀오고, 여장군은 파사성을 쌓기로 하였는데 여장군이 축성을 마치기 전에 남장군이 먼저 중국에서 돌아왔다. 여장군은 개군면 석장리까지 가서 돌을 치마폭에 담아오던 중 이 소식을 듣고 놀라 치마폭이 찢어지면서 돌이 떨어져서 그 마을에 돌담이 만들어졌고, 그 때문에 파사산성은 미완상태라고 한다.
   파사산성은 해발 230.5m인 파사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하여 남서쪽으로 완경사면을 감싸안고 있어 삼각형 모양이다. 산 정상부를 기점으로 하여 동쪽에서 서쪽으로 능선을 따라 내려오는 성벽은 해발 170m지점에서 회절하면서 동남방향으로 꺾여 곡저부를 따라 굴곡을 이루다가 다시 능선을 따라 올라가 출발점으로 연결되고 있다. 성의 전체 둘레는 943m정도이며 내부 면적은 대략 1만 2천평 정도이다.
   성벽은 비교적 정연하게 쌓았는데 시기별 축성기법이 달라 삼국시대에 축성된 부분과 조선시대에 개축된 부분이 확연하게 구별된다. 삼국시대 축성부분은 바른층쌓기로 아랫돌과 돌이 맞물리도록 쌓았지만 조선시대에 개축한 부분은 축성상태가 조잡하고 각층이 흐트러져 있으며, 상당 부분 붕괴된 상태이다. 특히 성벽의 북쪽 부분은 성벽의 잔존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대략 5~6m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축성방법은 대체로 편축하였으나 북쪽성벽은 협축하였는데 상부의 폭은 520m이다. 성벽은 한면이 장방형을 이루고 다른면은 뾰족하게 된 쐐기형 돌을 사용하여 외면을 축조하였다. 크기는 70×34cm, 80×12cm, 46×18cm, 56×24cm, 50×16cm, 18×24cm, 77×17cm, 62×15cm, 30×18cm, 30×10cm, 34×12cm, 65×23cm, 26×14cm이다. 성벽은 바른층쌓기를 하였는데 아래층의 성돌과 윗층의 성돌이 1/3정도 맞물리도록 쌓은 소위 신(臣)자형 쌓기를 하였으며 사이사이에는 쐐기돌을 박아 넣었다. 성의 기저부는 암반위에 바로 놓이도록 하였으며, 기단부하고 특별히 장대석을 사용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성벽은 전체적으로 약 70°정도의 기울기를 유지하고 있는데 들여쌓기를 하지 않고 자연스런 경사를 이루도록 하였다.
   성내의 시설로는 성문이 2개소가 있으며, 배수구 1개소와 우물지, 건물지 등이 있다. 파사산성의 남서쪽 해발 170m지점에 만들어진 남문은 폭이 4.7m정도이며, 좌우에는 높이 120m, 상부폭 40cm 크기의 화강암제 팔각형 고주초석이 남아 있다. 남문지 앞 10m지점에는 문확돌이 놓여 있다. 크기는 40×85cm의 장방형으로 다듬은 화강암으로 가운데 부분에는 기둥을 고정시키는 직경 15cm, 깊이 11cm의 원형 홈이 파여 있고 측면에는 8×9cm에 깊이 5cm의 장방형 홈이 파여 있다.
   동문은 파사산 정상부에 남서쪽을 약 100m 떨어진 지점에 있다. 이곳은 파성마을 방면에서 올라오는 길목이다. 동문의 폭은 4.6m정도이며, 서문에는 ㄱ자 형의 옹성이 구축되어 있다.
  수구는 남문에서 동쪽으로 약 10m 떨어진 곳에 있으며 크기는 폭 30cm, 높이 40cm정도이다. 수구가 이렇게 성벽상단에 위치하는 것은  성벽을 급경사면에 편축하게 됨으로써 성벽의 상단이 성벽안쪽의 경사면과 높이가 같게 되었기 때문이며, 수구 윗부분의 성벽은 무너진 상태여서 현재 길이 70~90cm 두께 20cm 내외의 판석 덮개돌 2개만이 남아 있다.
   우물지는 성내의 중간부분 해발 200m정도에 있다. 원형으로 축조된 우물은 둘레가 14.2m이고 직경 3.2m, 현재의 깊이는 3.4m이다. 20~40m크기의 할석을 이용하여 쌓았으며 틈새에는 작은 돌을 끼워넣었다. 우물의 윗부분의 50cm정도까지는 지상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최근 성벽복원공사를 하면서 우물내부를 파내었는데 내부에서는 상당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대체로 고려~조선시대의 와편과 자기편, 토기편이 주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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