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언

(洪純彦, 1530~1598)
 
   문신. 자는 士俊, 본관은 남양, 洪謙의 첫째 아들로 양평에서 출생하였다. 수충익모수기 광국공신, 판돈녕부사 당능군 행 병조참판, 천조사, 은자광록대부이다. 역관으로 임진왜란시 명나라에 구원병 청원하여 명군이 파병되었다.
   홍순언은 명나라의 만력 연간에 이름난 통역관이었다. 언젠가 명나라의 서울 연경에 들어갔을 때, 娼館에 놀러 간 일이 있었다. 그 중에 천금을 매긴 여인이 있었다. 홍순언은 그 여인을 불렀다. 16세의 매우 뛰어난 미인이었다. “어찌하여 나이어린 것이 이런 곳에 왔느냐”고 하니, 여인은 홍순언을 마주 대하고 나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소녀의 아비가 공금 1천 냥을 유용하시었는데, 이것을 채워놓지 않으면 곧 죽는 형벌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자식 된 제가 몸을 팔아서 아비를 구출하고자 사창에 나왔습니다.”하며 사연을 말하였다. 그러자 역관 홍순언은 딱한 사정과 딸과 같은 어린 소녀의 효성심에 감동하여 1천 냥을 주고 16세의 소녀를 구제해주었다는 것이다.
   홍순언은 조선의 역관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겼던 역관으로, 역관으로는 드물게 광국공신 당릉군으로까지 봉해진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가 그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까닭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宗系辨誣’ 즉 명나라의 『大明會典』에 잘못 기록된 태조 이성계의 족보를 바로잡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에 군사를 보내주도록 한 것이다. 조선이 명나라에 구원병을 얻어 낸 것은 홍순언이 구해준 소녀가 뒤에 명나라의 병부상서 石星의 부인(소실)이 되었는데, 자기를 구해준 조선 사람이 홍순언임을 알게 된 부인이 자초지종을 남편 석상에게 이야기하고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이에 명나라 석상은 크게 감동하여 홍순언의 일이라면 성심껏 도와주었다는 것이며, 이여송이 조선에 파송된 것은 홍역관의 역할이었다는 것이다. 그 공으로 역관이었던 홍순언은 병조참판까지 올랐던 것이다. 묘는 강남구 압구정동에 있었다. (양평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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