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운 묘

 □ 소 재 지 : 옥천면 용천리 산30-2
 □ 시     대 : 묘갈-숙종 38년(1712), 묘비-영조4년(1728)
 
   옥천면소재지에서 315번 도로를 따라 양평청소년수련원 방향으로 7.5km 정도 가다보면 왼쪽으로 설매재 사슴농원이 나온다. 설매재 사슴농원 앞으로 나있는 작은 길을 따라 100m 올라가면 왼편 구릉에 문화 유씨 모역이 나오는데 유상운 묘는 묘역 상당부에 위치한다.
   유상운(柳尙運, 1636~1707)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유구(悠久), 호는 약재(約齋) ․ 누실(陋室)이다. 본관은 문화(文化)로 좌랑 유성오(柳誠吾)의 아들이자 유봉휘(柳鳳輝)의 아버지이다.
   1666년(현종 7)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 전적(典籍), 강계부사(江界府使) 등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679년(숙종 5) 문과정시에 장원급제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도총부(都摠府) 부총관(副摠管) ․ 도승지(都承旨) ․ 한성부(漢城府) 좌윤(左尹) ․ 공조참판 ․ 대사간 등을 역임하면서,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일어나자 평안도관찰사로 전임되었다. 1683년(숙종 9)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병조 ․ 호조 ․ 예조의 참판을 역임하고 다시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그 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자 소론에 속하여 노론의 영수 김석주(金錫冑)의 전횡을 탄핵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 때에는 이조판서로 기용되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임하였다. 1696년(숙종 22) 소론의 영수 최석정(崔錫鼎)을 변호하다가 삭직(削職)되었다. 이듬해 다시 영의정에 올랐으나 노론의 탄핵으로 판중추부사에 전직되었다. 1701년(숙종 27) 무고(巫蠱)의 옥사가 장희빈까지 연좌되자 세자의 생모를 사사할 수 없다고 주장하다가 노론의 반대로 파직되어 이듬해 직산(稙山)에 부처(付處)당하였다. 1704년(숙종 30)에 풀려나와 이듬해 행판중추부사에 제수되고 나이 70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글씨를 잘 썼으며 나주의 죽봉사(竹峰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묘는 정부인 전의 이씨와의 합장묘로서 묘 앞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 장명등, 망두석, 문인상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전체높이 135cm, 폭 상 56cm ․ 하 51cm, 두께 12.5cm)는 월두형으로 비좌, 비신을 갖추고 있는데 비좌는 백색화강암이고, 비신은 백색대리석이다. 전면에 “領議政柳公尙運之墓 貞夫人全義李氏之墓” 후면에 “崇禎後再戊申…”이라는 글자와 유상운이 정해년에 지은 오언율시가 음기되어 있다.
   묘갈(전체높이 345cm, 너비 75cm, 두께 39cm)은 문화 유씨 묘역의 입구에서 왼쪽으로 100m 가량 아래에 동향하여 있으며, 지대석 위에 비좌 ․ 비신 ․ 옥개석을 갖추고 있다. 비문은 전 ․ 후면 상단에 횡으로 각각 “議政府領議政”, “約齋柳公碣名”의 전액을 새겨 놓았다. 건립연대는 1712년(숙종 38)으로 남구만이 짓고, 최석정이 글씨와 전액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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