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민선생 묘 및 신도비


 □ 소  재 지 : 옥천면 신복리 산247-1
 □ 시      대 : 조선 인조 13년(1635)
 □ 지정사항 : 양평군 향토유적 제6호
 
   옥천면소재지에서 351번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왼쪽으로 37번 국도와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37번 도로를 따라 가평 방향으로 2km 정도 가다가 서쪽으로 하천을 건너면 신복 1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신복 2리(말골)와 연결되는 마을도로를 따라 약 200m 지난 곳의 도로변에 신도비가 있고, 이 신도비의 동쪽 야산 능선을 따라 150m 올라간 곳에 이호민 묘역이 있다.
   이호민(李好閔, 1553~1634)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효언(孝彦), 호는 오봉(五峯), 남곽(南郭), 수와(睡窩)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연안군(延安君) 이숙기(李淑琦)의 증손이며 이천현감 이국주(李國柱)의 아들이다. 1584년(선조 17) 문과에 급제한 뒤 사가독서를 명받을 정도로 문재(文才)가 뛰어나 응교(應敎), 전한(典翰), 집의(執義)를 거쳐 임진왜란 때는 이조좌랑으로 의주까지 선조를 호종(扈從)했으며, 랴오양(遼陽)에 가 명나라의 지원을 요청하여 평양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공을 세웠다. 1595년 부제학으로 명나라의 외교문서를 전담했으며, 참찬관을 거쳐 동지중추부사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대제학 ․ 좌찬성을 거쳐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고, 그 뒤 부원군(府院君)으로 진봉하였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적서(嫡庶)의 차별 없이 맏아들을 즉위시켜야 한다는 입장론(立長論)을 주장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즉위를 반대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고부청시승습사(告訃請諡承襲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옥사에 연루되었고, 1615년에는 정인홍(鄭仁弘) 등이 입장론을 거론하여 그를 귀양 보낼 것을 간하였으나 광해군이 듣지 않았고 그는 7년간 교외에서 대죄(待罪) 하였다. 
   신도비문에 의하면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선산이 있는 향리인 이곳 옥천면 신복리에 송현초당을 짓고 은거하였으며 세상을 떠난 뒤 청백리에 올랐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며 저서로는 『오봉집(五峯集)』16권이 있다. 경북 안동 지례(知禮)의 도동향사(道東鄕祠)에 제향되었다.
   이호민 묘는 정경부인 파평 윤씨 ․ 양천 허씨와의 합장묘로서 묘 앞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 망주석, 동자상, 문인상 등이 배치되어 있다. 묘비(전체높이 160cm, 폭 55cm, 두께 21cm)는 1634년(인조 12)에 건립된 것으로 김주우(金柱宇)가 글씨를 썼다.
   신도비(전체높이 204cm, 폭 66cm, 두께 17cm)는 1635년(인조 13)에 건립되었으며 대리석재로 대석과 이수를 갖추었다. 이명한(李明漢)이 글을 짓고, 김주우가 글씨를 썼는데 이호민의 행적과 연안이씨의 집안 내력, 그리고 묘비문을 짓게 된 사연 등이 기록되어 있다. 관련 유물으로 이호민의 영정과 일괄유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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