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원사

(上院寺)

   상원사는 대한불교계종 제 25교구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용문면 연수리 산73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용문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으니 용문사와 윤필암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사찰에 관련된 사적지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언제 누가 창건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태고 보우의 제자인 유창(維昌)이 지은 태고의 행장기 곧 「이웅존자시원증행장(利雄尊者諡圓證行狀)」의 내용 가운데, 1330년(충숙왕 17) 봄에 용문산 상원암에 들어가 관음보살에게 예배하고 열두 가지 서원을 세웠다는 짤막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조선이 개국한 지 얼마 안 된 1398년(태조 7)에 상원암은 조안(祖眼)스님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상원사는 본래 용문사에 속한 산내 암자였던 사실을 알 수 있으며 관음도량으로 이름이 높았던 것 같다. 조선의 세조 역시 이곳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였다고 하는데, 이때의 정황을 최항(崔恒, 1409~1474)이 쓴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1책 7권, 규6611․6612)에서 볼 수 있다.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조가 왕비와 세자와 함께 경기도를 순행하다가 효령대군의 원찰이었던 상원사를 들르게 되었는데, 그때 백의관세음보살이 나타나고 상서롭고 아름다운 빛이 비추고 또 음악이 들리다가는 사라졌다. 감격한 세조는 절에 쌀 200석을 하사하고 내관으로 하여금 향을 올리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궐로 돌아와서는 죄인들을 사면시켰으며, 정부관원들은 축배를 들어 경하하였고 훈부(勳府)에서는 상원사에 불상을 조성하여 건물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친견한 백의관음보살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여 전국에 배포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신숙주, 홍응, 전균을 상원사에 보내어 다시 공양을 올렸다고 한다.
   이후 상원사에 관한 기록이 없어 그 연혁을 알 수가 없는데, 1530년에 편찬된『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1760년에 편찬된 『여지도서』, 1799년에 편찬된『범우고』 등에 절이름만 보일 뿐이다.
   상원사는 용문산과 그 주변에 있는 사찰과 마찬가지로 그 지리적 여건으로 하여 20세기에 들어와서도 몇 차례의 병화로 말미암아 절이 모두 불타버리는 비운을 겪었다. 특히 1907년 의병투쟁 때 법당을 뺀 나머지 건물이 모두 불탔으며, 1918년 화송(華松) 스님이 큰방을 재건하였고, 1934년에는 경언(璟諺)이 객실을 신축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용문산전투를 겪으면서 다시 불에 타버렸다.
   1969년 덕송(德松) 스님이 초막을 지어 법등을 다시 밝힌 이래로 점차 절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해 오늘에 이른다.
   대웅전은 1975년에 지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의 목조건물로 안에는 석가여래상과 약사여래상 그리고 관음보살상이 모셔져 있고 후불탱화가 장엄하였다. 용화전은 1977년에 지은 목조건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이고 팔작지붕이다. 삼성각은 1972년에 지은 목조건물로 정면과 측면이 단칸이며, 안에는 칠성탱, 독성탱, 산신탱을 모셨다. 최근에는 선원을 새로 지었다.
 『관음현상기』에는 당시 상원암의 가람배치를 그린 그림이 딸려 있어 상원사의 옛 모습을 추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석축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상원사의 옛 모습을 짐작하게 하는 유물과 자취가 남아 있다. 특히 돌사자나 팔각연화문대석, 팔각의 석조물 등이 눈에 띈다.
   돌사자는 길이가 87cm, 높이가 53cm에 이르는 제법 큰 규모인데 앞쪽 두 발은 모두 개어져 없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양감이 풍부하고 얼굴 표정이 사실감을 잘 표현하여 생동감이 느껴지는 뛰어난 조형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석사자상은 원래 어떤 용도로 조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석사자상은 고려 전기 이하로는 제작연대가 내려가지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
   팔각연화문대석은 원래 어떤 석조물의 하대석으로 쓰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한 돌로 이루어진 대석의 아랫부분에 안상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팔각연화문대석은 조형 수법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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