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사지

(菩提寺址)

   보리사지가 자리한 곳은 용문면 연수리이다. 연수초등학교를 지나 용문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산간 평지라 할 만큼 너른 구릉지가 펼쳐져 있다. 곳곳에 석축이 남아 있는데, 산사면으로 갈수록 한 단씩 높아지는 축조방법으로 이루어진 절터이다. 이 절터에는 이 절에 주석했던 대경대사(大鏡大師) 여엄(麗嚴, 862~930)의 부도와 탑비가 남아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20년 무렵에 일본인이 탑과 비를 반출해갔다고 하는데, 현재 부도는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탑비는 경북궁 뜰에 옮겨져 있다. 폐사된 지 오래되어 유구는 남아 있지 않고 석축과 기와 조각만 눈에 띌 뿐 경작지로 남아 있던 절터는 현재 선운사란 절을 새로 지으면서 터를 닦느라 그나마 남아 있던 옛 모습마저 많이 잃어버려 안타깝다. 다만 몇몇 군데에 주춧돌이 남아 있어 그런 대로 절터의 편린을 짐작해볼 수 있다.
   보리사에 머물렀고 탑과 탑비를 이곳에 남긴 대경국사 여엄은 중국에서 909년(해공왕 130에 들어와서 얼마 되지 않아 고려 태조의 배려로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감안해 보면 이미 신라말에는 이곳에 절이 경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엄 스님은 용문산 내에 있는 용문사를 913년에, 사나사를 923년에 창건하였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중심이 되는 보리사의 사세가 매우 컸으리라 짐작할 수 있으며, 따라서 가람의 규모도 성대했으리라 가늠할 수 있다. 1407년(태종 7)의 기록에 의하면 보리사는 조계종의 대표적인 사찰로서 보리갑사라 불렀으며 또한 자복사(資福寺)로 지정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초기에 억불숭유라는 국가의 정책에 따라 많은 사찰이 통합되고 훼철당할 때도 보리사의 사격(寺格)은 자복사로 지정될 만큼 높았고 여전히 사세가 융성하였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20여 년 뒤인 1530년(중종 25)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지평현 불우조」를 보면 “미지산에 있다. 고려 상서좌복야 최언위가 지은 승려 대경의 현기탑비가 있다.”
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까지도 보리사는 건재했던 것으로 여겨지나 그 이후의 연혁은 알 수 없어 언제 어떤 연유로 폐사가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시에 병난(兵難)을 겪는 과정에서 절이 무너졌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1950년에 일어났던 한국전쟁 당시에도 이곳 용문산 전투가 전사에도 기록될 만큼 이곳의 지리적 위치가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현재 보리사지 일대는 앞서 말한 대로 선운사라는 절이 들어선데다가 일대가 계곡을 끼고 있어 풍광이 수려한 때문인지 주택이 새로 들어서고 있는 등 절터의 파괴가 지속되고 있다. 보리사가 지닌 문화사적 의의는 매우 크므로 더 이상 파괴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서둘러 보존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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