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리 성지

□ 소 재 지 : 양서면 신원리 부용산 정상
□ 시    대 : 삼국시대
 
   신원리 성지는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의 해발 365.9cm인 부용산(芙蓉山)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 테뫼식의 석축산성이다. 부용산은 한강의 북쪽으로 강에 면해 있는 산으로서 강을 따라 중앙선 철도와 6번 국도가 지나가고 있으며 남쪽에 있는 검단산과 마주보고 있다.
   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각 방면에서 능선을 따라 올라가는 여러 길이 있으나 남동쪽으로 해발 100m 지점에 월계사가 있고, 이 절까지 포장이 되어 있어 절 뒤편으로 올라가면 쉽게 산성에 오를 수 있다.
   신원리 성지에 대한 문헌기록은 고문헌에 일체의 관련기록이 없어 초축시기라든가 유래를 알 수 없다. 이 성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일제시대의 조사자료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서 “양서면 신원리 소재의 부용산 정상에 있다. 성벽은 대부분 붕괴되었으나 다만 석축의 일부가 잔존한다”하였고, 『문화유적총람』에도 역시 동일한 내용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후 1985년 한양대학교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한 내용이 있다.
 
   이 산성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옛날 한 왕비가 시집간 첫날밤 왕 앞에서 소리 내어 방귀를 뀌게 되었다. 크게 노한 왕이 그 다음날 이곳으로 귀양을 보내었는데 쫓겨난 왕비가 아들을 잉태하여 갖은 설움과 모진 역경 속에서 달을 채워 왕자를 낳았다. 유달리 총명한 그 왕자는 장성한 후 전후 사정을 알고 도성으로 올라가서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돌아다니며, “저녁에 심었다가 아침에 따먹을 수 있는 오이씨를 사라”고 외치고 다녔다.
   처음 하루 이틀은 모두가 미친 녀석으로 알고 있었으나 차차 소문이 퍼져 급기야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임금이 소년을 불러서 물으니 그 소년은 “분명 이 오이씨는 저녁에 심었다가 아침에 따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조건은 밤사이에 아무도 방귀를 뀌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문득 깨달은 왕은 그 아이가 자기 아들임을 알았다. 임금은 그 소년으로부터 그간의 이야기를 듣고 왕비를 불렀으나 왕비는 궁궐로 가지 않고 이곳에서 살다가 죽었는데, 그 무덤이 산 정상부에 있는 고분이라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이 산에 오르는 것이 금기시되어 왔다고 하며, 산에서 땔감을 취한다든가 성안에서 우물을 발견하면 곧 죽는다고 한다.
   부용산성은 석축산성으로 평탄한 정상부를 둘러쌓고 있어 전체적인 형태는 동-서를 장축으로 하는 장타원형이다. 장축은 직경 200m정도이고 단축은 20m정도이다. 성 내부는 동 ․ 서로 양분되는데 동쪽이 5m가량 높고 그 위에는 직경 16.2m, 높이 5.5m의 고분이 있다. 그리고 동쪽부분에는 근래에 헬기장이 조성되어 있으며 서쪽부분에는 경주 이씨의 묘가 새롭게 조성되어 있다.
   성의 둘레는 543.7m이며 성벽은 내탁과 삭토에 의한 편축을 하였는데 대부분 무너진 상태이나 높이는 대략 430cm 정도이다.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장대석을 깔고 다듬은 돌로 정연하게 쌓은 반면, 윗부분은 다듬지 않은 돌들이 고르지 않게 쌓여져 있다. 성 내부에 우물지는 발견되지 않으며 문지로 추정되는 곳은 2곳이 있는데 원래의 규모를 알 수 없다.
   성의 남쪽 경사진 부분에서 와편과 토기편이 일부 채집되었는데 대체로 삼국시대 신라계의 유물들이다. 이는 1985년 한양대학교에서 지표조사 당시 산 아래쪽에서 신라계의 단각고배가 수습된 점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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