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

(崔益鉉, 1833-1906)
   독립유공자. 조선말기 문신. 자는 贊謙, 호는 勉庵, 초명은 奇男, 관향은 경주이다. 1833년에 경기도 포천군 내북면 가체리에서 芝軒岱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4세에 부친을 따라 단양으로 가서 살았고 1843년 11세에 양평군 서종면 서후리로 이사하여 21세까지 살았다. 여기서 면암은 노문리 벽계로 가서 화서 이항로 문하생으로 입문하고 스승 화서 댁에서 유숙하면서 수업하였다. 부친 岱는 이미 화서의 명성을 듣고 화서의 문인이 된지 여러 해였다. 이때에 와서 奇男을 명하여 화서에게 제자의 예를 올리고 수업하게 된 것이다.
당시 화서는 어린 기남을 보고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알고 성심으로 교도하여 돌보았다. 화서는 특별히 사랑하여 「洛敬閩直」이라는 네 글자를 크게 써서 주었다. 겨울에 집으로 갔다가 다음해에 화서의 명으로 쌍개를 땋고 벽계에 머물러 수업하다 12월에 다시 하직하였다. 이때 화서는 「勉菴」 두 글자를 대자로 써서 주었는데 이것이 면암의 호이다. 1850년 여름 18세에는 또 화서에게서 「存心明理」라는 네 글자를 받았다.
   1855년 23세에 명경과 갑과에 급제하였다. 면암이 과거에 합격을 시작으로 승무원 부정자, 사헌부지평, 장령 등을 거쳤다. 면암은 대원군의 실정에 대하여 경복궁 역사정지, 조세경감, 당백전혁파, 4문의 세를 받지 말 것 등을 들어 조목조목 통박하였다. 고종이 기꺼워하여 통정대부에 승차시키고 동부승지에 제수 되었으나, 사임하고 이후에도 시정을 논박하였다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1875년에 돌아왔다.
   1876년 조정이 일본의 구로다(黑田淸隆,1840-1900) 수호통상을 청하였는데, 조정에서 이에 응하고자 하자 격렬한 척화소를 올려 극력 반대하였다. 면암은 도끼를 가지고 광하문 밖에 나아가 엎드려 상소문을 올리고 노숙하며 밤을 세웠다. 극렬한 반대상소로 면암은 흑산도에 유배되고 말았다. 3년 후인 1879년에 돌아와 다음해 호군 및 특진관을 배명하고 대원군이 재집권하여 자헌대부에 승차, 공조판서에 제수 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시 역당을 족치고 옛 복제를 회복할 것을 상소하였고 단발령을 내리자 복수보발을 계획하였으며 유길준이 협박하매 불변의 뜻을 나타내고 구금되었다가 김홍집의 피상과 전 국민의 반대로 단발령이 폐지되자 풀려났다.
1898년에 의정부 찬정 궁내부 특진관에 拜命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임하고 12조의 시무책을 건의하고 국정을 바로 잡을 것을 역설하였고 1902년 4월에 정헌대부로 승진하였다. 12월 2일 황제가 입대할 것을 유시하여 수옥헌에 입대 5조 시무책을 진상하고 포덕문 밖에서 대명하였다. 그 후 동월 8일 시무책을 실행을 간청하고 또 일본차관의 그릇됨을 역설하였다.
   1900년에는 가평에 있는 조종암 대통단, 횡단 제향에 참석하고 재실에서 강회를 베풀었다. 1903년에는 강수계를 논의하여 정했는데, 그 목적은 화서의 추모사업으로 문집 ․ 화동강목, 주차집보를 간행하는 일, 구댁을 도로 물리는 일, 묘소에 비석을 세우는 일, 영당을 창건하는 일 등이었다.
   1905년 1월 고종이 3만전과 3석미를 하사하였으나 사양, 환납하고 1월 14일 경기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임하고 다시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2월 6일 앞서의 시무책에서 매국역신을 처단할 것을 주장한 것이 화가 되어 포천집으로 돌아왔으나 그 후 다시 명동헌병대에 체포되어 충청도 정산으로 압송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강수계의 유명무실에 따라 9월 9일에는 평창군 봉평면에 奉山書齋 창건을 위해 이우면․이근원 등 21명과 함께 통문을 돌려 1906년에 창건되었다.
그 해 11월 18일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5적을 베일 것을 강력히 건의, 상소하고 온 국민에게 보내는 ‘근고 8도 사민서’를 고제 백홍인에게 작성케 하여 전국에 포고하였다 이어 백홍인에게 전남 능주에서 5월에 거사할 수 있도록 모병, 군수등 준비를 하라는 명을 내렸다.
   1906년 2월 거의하기로 결심하고, 가묘를 하직하고 가솔들과 작별한 후 창의할 계획을 위하여 호남을 향해 떠났다. 면암은 판서 이용원․김학진, 관찰사 이도재, 참판 이성렬, 이남규․곽종석․전우 등에게 편지를 보내 함께 거의하기를 권하였으나 반응이 없자, 크게 실망하였다. 문인 백홍인의 피체로 능주 거사마저 여의치 못하자 무인 고석진부터 갑오의병장 임병찬을 추천받고, 문인 최제학을 파견하여 함께 거의하기로 하였다.
   그 후 능주에서는 면암을 맹주로 하여 호남항의소를 설치하고 거사에 만저을 기하였으며 그 후 제2기 의병의 전체적 선봉이 되어 큰 성과를 올렸다. 이때 임병찬이 와서 “호서의병이 선생을 맹주로 추대하여 일군을 토멸코자 한다”하니 곧 출동키로 하였으나 참판 민종식이 홍주에서 거의한다는 말을 듣고 “호서의 맹주가 있으니 나는 영․호남의 의병을 규합 호서와 상응하겠다” 하였다. 곽한일․남규진이 와서 동참하고 성명을 새긴 인장과 존양토복기를 만들어 주고 호서에서 활약케 하였다. 면암은 이재윤을 시켜 오재열과 함께 무기를 정비하여 운봉을 지키게하고 면암은 최재학과 태인에 있는 임병찬에게 가서 상중에 있는 임의사에게 거의하기를 명하여 소집, 군령, 연병의 일을 맡겼다.
   이때 의암 유인석이 서신으로 토적의 계책을 물어오니 면암은 남북으로 상응하여 토적할 것을 답하고 영남의 조재학․이양호에게 영남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상응할 것을 명하였다.
1906년 윤4월 13일 태인에 머무르면서 무성서원에 배알하고 여러 문생들을 거느리고 강회를 하고 거의의 상소문을 올렸다. 그리고 문생들과 앉아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나에게 종유하는 제군들은 나와 생사를 같이할 수 있겠소?”하였다. 이에 문하생들이 모두 좋다고 하여 자리를 같이한 80여 명과 향교에 들어가 거의하여 토적할 뜻을 先聖에 고하고, 곧 이어 고을의 부노들을 불러 대의를 일깨우니, 모두 호응하였다.
   고용진이 강종회 등 30여명 포수를 이끌고 합세하여 군세가 대단하였다. 정읍․순창․곡성에 유진하는 동안 많은 의병이 내참하고 군량과 무기도 준비되어 임병찬․김기술․유종규․김재용․강종회․이동주․이용길․송종궁․정시해․임상순․임병인․송윤주․임병대․이도순․최종달․신인구 등에게 명하여 부서를 정하고 임무를 주었다. 그리고 각 군에 격문을 급히 보내어 궐기한 것을 촉구하고 거의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면암은 일본정부에 서신을 보내어 신의를 배반한 16조의 죄목을 열거 그 죄상을 따졌다. 면암은 왜적을 규탄하고 의병군을 영솔하여 정읍과 순창 등지로 진군하다가 4월 20일에 전주 관찰사 한진창, 순창군수 이건용 등이 일군과 연합하여 전주, 순창 진위대병으로 공격하였다. 면암은 진위대에게 귀환을 권하였으나 듣지 않고 발포하므로 격전이 벌어져 의병장 정시해가 전사라고 의병 천여 명이 궤멸당하였다.
   면암은 23일 임병찬 등 12인과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왜군사령부에 구금되었다. 6월 25일 일군 사령부에서 대마도 감금 3년의 선고를 받고 7월 8일 2년 감금의 선고를 받은 임병찬과 함께 대마도 위술영 경비대안에 감금되었다.
면암은 여기서도 일제와 항쟁하다가 단식하고 횡제께 올릴 유서를 불러주며 임병찬으로 하여금 쓰게 하고 죽기를 결심하였다. 병세가 위독하자 대장이 군의관을 파견, 진찰하고 약을 보냈으나 거절하고 11월 17일 구국항쟁의 영수인 면암은 적지 대마도에서 동지들의 애도 속에 서거하니 향년 74세였다.
   저서로 『勉蓭集』이 있다. 정부에서는 1962년에 건국공로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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