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사 대경대사 현기탑비

□ 시    대 : 고려시대(939)
□ 지정사항 : 보물 제 361호
 
   이 비는 원래 보리사지(菩提寺址)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에 의해 유출되었다가 현재는 서울 경복궁 안 자경전(慈慶殿) 앞에 놓여 있다.
   대경대사(大鏡大師) 여엄(麗嚴, 862~930)은 고려말 신라초의 선승이며, 해동사무외(海東四無畏)의 한 사람이다. 속성(俗姓)은 경주 김씨이며 충청남도 남포(藍浦) 출신이다.
   9살 때 무량수사(無量壽寺)로 출가하였고, 『화염경』을 공부한 뒤 19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러나 교종(敎宗)의 가르침에 의심을 품고 참선에 뜻을 두게 되었다. 수엄산 성주사(聖住寺)에서 선법(禪法)을 펴고 있는 무염(無染)선사를 찾아가서 몇 년에 걸쳐 수행하였다. 887년(진성여왕 1)에 무염선사가 입적하자 남쪽으로 내려가 영각산(靈覺山)에 있는 심광(深光)을 찾아가서 역시 몇 년 동안 수행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가서 운거(雲居)의 지도를 받았다. 그곳에서 몇 해 동안 정진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 운거의 법맥(法脈)을 전해받고 909년(효공왕 13)에 신라로 돌아왔다. 나라는 전란이 심하여 월악(月嶽)과 미봉산(彌峯山)으로 피난하였다가 다시 소백산에 의거하였다. 그때 그의 덕을 흠모한 고려의 지기주제군사(知基州諸軍事) 강훤(康萱)이 태조에게 아뢰자, 태조는 지평(砥平, 양평군) 보리사의 주지로 임명하였다. 그 뒤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마음을 다하다가 930년(태조 13)에 입적하였다.
   태조는 대경대사(大鏡大師)라는 시호와 함께 현기(玄機)라는 탑호(塔號)를 내렸다. 비문은 왕명을 받들어 최언위(崔彦僞)가 짓고 이환추(李桓樞)가 비문과 전액을 썼다. 비는 업적한 지 9년이 지난 939년(태조 22)에 세워졌는데 대사의 제자 최문윤(崔文尹)이 새겼으며, 비 뒷면에 문도들의 명단을 적은 음기(陰記)는 3년 뒤인 942년에 새겼다.
   비는 귀부와 비신 그리고 이수를 갖추고 있으며, 보존상태도 비교적 양호하다.
전체적인 비례로 볼 때 머릿돌인 이수는 거대한 데 비해 귀부는 납작해진 모습이어서 균형은 잘 맞지 않는 편이다. 귀부는 평범하여 용머리는 입에 여의주를 물도 있고 등에는 세밀한 육각형의 귀갑문이 새겨져 있는데, 비신을 받치는 비좌(碑座)의 양 측면에는 앙련의 연꽃을 새기고 있다. 비신은 오석이며 비양의 표면에 약간의 흠집과 균열이 있는 외에는 양호하다. 머릿돌인 이수(螭?)는 매우 화려하게 운룡문(雲龍紋)을 조각하였으며, 중앙에 자리한 전액(篆額)의 글씨는 마모가 심해 판독할 수 없다. 비문의 글씨는 2.5cm 안팎이며, 구양순(區陽詢)체를 따른 해서(楷書)이다.
   전체 높이는 350cm이고, 비신은 높이가 176cm, 너비 80cm, 두께 24.5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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