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 격

(許格, 1595-1690)
   조선조 학자. 자는 春長, 호는 滄海, 鵝湖, 崇禎處士, 본관은 양천, 좌찬성 許硡의 5대손, 효자 허 회(許淮)의 다섯째 아들이다. 이안눌(1571-1637)의 문인이다. 문장과 기절로 이름나 있고 서종면 수입리 바치울에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627년(이조 5)에 조정이 청나라와 화친한 것에 대하여 비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산천을 방랑하다가 덕수이씨 문정공 이식(1584-1647)의 권유로 과거에 나갔었으나 법식이 맞지 않아 빠졌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태백산에 있으면서 의사를 모집하여 참전하려다 남한산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복망통곡하였다. 창해는 의리상 세상에 서지 않겠다고 절벽위에서 떨어져 죽으려 할 때에 마침 붙잡은 사람이 있어서 죽지 않고 단양 산속에 은둔하여 지냈다. 또한 천자 명나라 황제 의종이 순사직하고 오랑캐가 북경에 진주한 후 온 천하가 다 머리를 치발함에 더욱 슬퍼하였다. 스스로 창해처사라하고 호를 정하였는데 이는 중국 晉나라 도연명이 전국시대 절의를 지킨 형가를 읊은 뜻에 따른 것이다.
   가평군 하면 대보리에 시냇물이 서쪽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르는데, 이를 조종천이라 한다. 창해는 이 ‘朝宗’이라는 이름을 사랑하여 숙종10년에 가평군수 이제두와 선비 백해명과 의논하기를 “이곳은 천하에 깨끗한 곳이다. 명나라 사직이 폐허가 된 후 우리는 추모하는 마음을 붙일 곳이 없더니 이제 얻었다”하고 구정을 생각하고 보온을 잊지 않기 위하여 조종천변 큰 바위에 명나라 말의 의종황제의 친필 ‘思無邪’ 세자를 각자하였다. 여기에는 照敬王(宣祖)의 필인 ‘萬折必東 再造藩邦’과 효종대왕의 비답 중 ‘日暮途遠 至痛在心’ 8자를 우암 송시열의 필적을 받아 새기고, 낭선군(俁)의 전서 ‘朝宗巖’ 석자도 각자하여 놓았다. 그리고 그곳의 주민들에게 잡역을 면제하고 수호케 하였다. 창해는 조종암을 새긴 후에 시를 지었는데,
 
밤중에 앉아보면 각종 별이 많으나
역력히 다 북두칠성이 높은 줄 알고있네
천지개벽 후 세월은 얼마나 되었는지
제왕은 예부터 지금까지 천지를 달리했네
군과 신은 참아 崇明하던 무릎을 청에게 꿇었는가
父老가 아직도 입진란의 은혜를 품고 있는데
靑史는 병자 항복한 일을 논하지 마소
하늘에 태양이 하나라고 孔子님은 말하였네.
  
   이렇게 하면서 명나라를 높이고 청나라를 배척하였다. 또 사당을 세워 신종황제 제향을 받들고자 함에 송우암이 듣고 좋아하면서 의종황제도 모실 것을 언급하였다. 충북 화양동의 만동묘와 서울 비원의 대보단은 여기에 근본한 것이다.
   창해는 또 바위 밑 맑은 물위에 작은 단(大統壇)을 설치하고 매년 의종황제의 제삿날이 되면 이백과 함께 모여서 북망통곡하였다. 또한 효종대왕 휘일에도 통읍하고 고기를 먹지 않으며 시헌력(청나라 책력)을 보지 않았다. 당시 삼전도 비문을 썼던 이경석(1595-1671) 사신으로 북경에 가는 길에 창해에 야복으로 홍제원에 가서 전송하면서 시를 증정하였는데, 그 詩에 ‘전하에 산이 있어 나는 이미 숨었으며 세상에 황제는 없는데, 당신은 누구에게 조회하러 가는가’하며 비웃었다.
   그 후에 창해는 해주 수양산에 백이 숙제 사당을 세우고 그 고을사람들로 하여금 받들도록 권하니, 이것이 청성묘라는 것이다. 창해는 언론이 격하여 忤죽醴?(때에 거슬러 재앙을 만남)하여 본군에서 10년의 옥살이를 하였다고 한다. 84세에 별세하니 박세채(1631-1695)가 ‘大明處士’라고 명정을 썼고, 46년 후에 영남 유생 권형만 등이 포장할 것을 청원하여 1735년(영조 11) 숭정처사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묘는 서종면 꽃대울(花時谷)에 있다. 漁隱의 후손 仁茂氏가 2006년 12월에 천묘했다. 저서에 『滄海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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