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남표

(洪南杓, 1888~1950)
 
   사회주의 운동가. 본관은 남양인데 1888년 양평읍(갈산면) 신애리 빈농에서 태어나 중앙학교(중앙고등학교의 전신)를 졸업하였다. 1910년 8월 국권피탈에 반대한 시위로 체포되었으며,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10월 만주지역의 독립운동가를 후원하다가 간도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 대한 일제의 무자비한 학살인 일명 간도참변을 피해 베이징[北京]으로 피신하였다. 1920년 6월 국내로 잠입하던중 丹東縣에서 검거되었으며, 출감 후 1924년 홍명희·홍증식·구연흠·박일병 등이 결성한 사회주의 사상 단체인 화요회의 중앙위원이 되었다.
   1925년 3월 최남선이 창간한 ‘시대일보’의 지방부장이 되었으며, 4월 조선공산당이 개최한 전조선민중운도자대회 과정에서 일본 경찰의 강력한 제지에도 불구하고 대의원들과 군중들이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만세’, ‘무산자만세’ , ‘무리한 경관의 압박에 반대하다.’ 라고 적힌 적기(赤旗)를 앞세우고 행진한 사건인 일명 ‘적기사건’에 동참하였으며, 11월 조선공산당 조직부장에 선임되었다.
   1926년 6·10만세사건에 참여한 뒤 검거를 피해 상해로 망명하여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8년 12월 홍남표가 체포되고 한인지부는 전폐되었다. 1945년 11월 전국 각 지역에 조직된 인민위원회 대표자들이 모여 조선의 완전독립, 미군정과의 관계, 기타 당면문제를 심의하기 위해 개최된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에서 집행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46년 2월 좌익세력의 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46년 9월 9일 총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부평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1948년 8월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 대회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위원에 선출되었다. (양평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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