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회진 부인 벽진이씨

(碧珍李氏)
   효절부. 본관은 벽진, 화서 이항로의 장녀로 서종면 벽계 출신이다. 결성인 張集星의 다들이요 화서문인인 동우 張會鎭에게 출가하였다. 이씨는 숙원의 덕과 정정의 행실이 있는데다가 밖으로 부친의 엄한 교훈과 안으로는 모부인 고령박씨의 바른 교화가 있었다. 太任 太姒를 사모하고 틈틈이 女四書를 읽어서 부덕이 지극히 갖추어졌다.
   부모를 섬김에 곁을 떠나지 않고 시중들고 음식 장만하는 일을 오직 부모가 원하는 대로하여서 기쁘게 해드리는데 힘썼다. 출가함에 이르러서는 시부모 봉양과 남편 받드는 일이 법도를 따라 옛 어진 부인에게 견줄 만하였다. 하루는 친정에 歸寧하고 있을 때, 남편 동우가 와서 대부인의 병환을 얘기하고 함께 집으로 가서 간호하려 하였는데, 동우가 어버이를 공양할 음식물을 구할 생각으로 시내에 가서 물고기를 잡다가 깊은 물에 미끄러져 미처 구하지 못하였으니, 이 때 이씨의 나이가 26세였다.
   이에 부인이 부르짖으며 손가락을 베어 피를 흘려 넣었으나 회생할 가망이 없었다. 이에 크게 통곡하다가 기절하니, 주위 사람이 구하였다. 다시 약을 마셔 쫓아 죽고자 하였으나, 이 또한 주위에서 막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주위에서 타이르기를 “남편이 효도에 사망하였는데 어진 부인이 정렬에 죽고자 하니 천지 綱常이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겠으나, 시아버지는 누구를 의지하며 어린 자식은 누가 기르며 종사는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그대가 그렇게 한다면 그대 자신은 돌아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張門의 후사는 어찌할 것인가! 아픔을 참고 슬픔을 눌러 문호를 보전하느니만 못하다”고 하였다. 반복하여 말을 해도 전혀 들으려 하지 않고 어두운 방에 들어가거나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기필코 목숨을 버리려 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부친 화서가 매우 근심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옆에 꼭 붙어서 그 거동을 지켜 나머지 삶을 보전하게 하였다. 이에 그 가르침을 억지로 좇아 거상의 예를 극진히 하여 삼년상을 마쳤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자 슬픔과 정성이 능히 갖추어졌으며, 늙은 시아버지를 효성으로 봉양하고 남편의 동생에게 우애하고 자녀를 교육하여 가업을 이룩하였다.
   부친 화서가 무옥을 당하였을 때 포졸들이 무례하게 내당으로 난입하자 엄한 말로 꾸짖어 말하기를 “어찌 이처럼 무례하는가? 죄가 있고 없는 것은 공대에서 저절로 밝혀질 것이거늘 어찌 내외의 구분이 없는가?” 하였다. 금낭이 이 말을 듣고 포졸을 꾸짖어 엄금시켰다 한다.
   화서는 외손부 심씨에게 써 준 시에서 「네 시아버지가 나를 따라 새워서 함께 朱子書를 읽었다. 옛날 王祥과 벗할 만하더니 마침내 王祥과 같은 효도에 죽었다. 네 시어머니가 통곡하다 기절하여 약을 마시고 좇아 죽으려 하였다. 주위 사람이 급히 구해내고 道理로써 차근차근 이해시켰다. 시아버지 봉양에 남편 효도를 대신하고 시동생을 길러 남편의 아름다움을 이루었다. 겨를에는 「여사서」를 읽으며 옛 班氏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손수 베껴 잘 싸서 보관하여 네가 시집올 때 준 것이다. 네 시아버지가 비록 살지는 못했으나 王祥과 비교하기에 해롭지 않고 네 시어머니가 죽지는 않았으나 陳孝婦와 같음에 부끄럽지 않다」고 하였다.
   화서가 외손부 심씨에게 써준 이 시는 친필 그대로 화서기념관 앞에 현손 장기덕이 자연석에 각자하여 수비하였다.
   이씨의 「효절부기행비」는 노문리 이씨가 출생한 친정집(화서고택) 건너편에 전국 유림들이 건립위원회를 조직하여 1999년 동우 장회진의 효자비와 함께 나란히 세웠다. 그 후 1년이 지나서 뜻 있는 인사 10명이 벽계 마을회관 앞에 「효절부유인벽진이씨추모비」를 세웠다. 묘소는 벽계 남쪽 가마봉에 부군(장회진)묘에 합장되어 있다. 이조참판 도승지 단운 민병승이 묘표를 지었고, 양서 박준빈이 행장을 지었으며, 효절부기행비문은 퇴운 이지풍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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