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로

(李恒老, 1792-1868)
   조선말기 성리학자. 자는 面述, 호는 華西, 시호는 文敬, 초명은 光老, 본관은 벽진, 李晦章의 아들이다. 1792년 양근군 서종면 노문리 벽계 출신이다. 3세에 千字文을 떼고 6세에 십팔사략을 배웠으며 12세에는 상서를 익혔다. 1808년(순조 8) 한성시에 합격했으나 과거에 불정이 있음을 보고 이를 단념, 오로지 학문에만 전심하며 후진을 양성했다.
   화서는 14, 5세 때부터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마에 주력할 계획을 했었다. 16세에 화서는 부친 우록헌이 글을 배우던 임종주(1734-?)의 아들 영서 임노(1755-1828)를 만나보았다. 또 21세에는 지평에 가서 죽촌 이우신(1762-1822)을 만나보았다.
   1813년(22세)에 학문을 스승에게서 이어받지 않고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화서는 번잡한 세상을 떠나 쌍계사와 고달사 등 절간이나 조용한 곳을 찾아 ‘위기’ 공부에 전념하였다. 공부함에 있어서 화서는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주자의 학문을 연구하였다. 화서는 『朱子大全』을 읽고서는 그 학문이 진실로 주자 이후의 正宗임을 깨닫고 주자 다음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화서는 항상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주자를 종주하지 않으면 공자의 문정에 들어갈 수 없고 송자를 헌장하지 않으면 주자의 계통에 접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화서는 매일 동틀 무렵에 일어나자마자 꿇어앉아 『詩經』의 억시와 주자의 「경재잠」을 외우고 난 후에,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을 정제하고 가묘에 참배하였다. 이 「경재잠」도 「백록동학규」와 마찬가지로 화서의 인격형성과 생활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나아가 그 학파에게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화서의 학문은 성과 경을 수양의 근본으로 하였고, 사소한 일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화서는 主敬하는 공부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천만가지 善도 이에 따라 생겨나고 천만가지 악도 이에 따라 소멸된다고 하였다.
1824년 33세에는 가평에 있는 조종암을 답사하고, 계획한 바 있었으나 실현하지 못했는데, 존화양이의 취지로 ‘見心亭’을 세우려고 하였던 것이다.
   면암 최익현은 「華西李先生神道碑銘」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선생의 학문은 『소학』과 『주자가례』로 근본을 삼고, 『대학』   『논어』『맹자』『중용』으로 주를 삼았다. 그런 다음 경사에 미쳐 차근차근 순서가 있었으며, 주자를 공자 후의 일인자라고 여겨 경서의 주석을 위시하여 『朱子大全』『朱子語類』에 이르기까지 사랑하기를 부모와 같이 하였고 공경하기를 神明과 같이 하였다.
이어 『宋子大全』을 읽었는데, 정주의 전체와 춘추의 대용이 이 책에 있음을 보고는 시조리와 종조리가 참으로 주자 이후의 정종이라고 생각하여, 그 존숭하고 심복하기를 주자 다음으로 하였으니, 그 문로의 정대함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선생의 知行 공부가 敬 으로 일관하게 된 것이다. 비록 시대는 주자․송자와 다르지만 사실은 서로 부합하는 것이다.”
화서는 「閭塾講規」를 만들어 교육을 실시하였다. 화서의 여숙강규 중에서 강계 9조목은 화서의 교육철학이 담겨져 있는데, 그 첫째와 여덟 번째 조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무릇 같이 강학하는 사람들은 인원수만 채워 입으로 읽기만 일삼지 말고 반드시 내 몸에 돌이켜서 체험할 것을 생각하여 마음으로는 그 묘리를 깨닫고 몸으로는 그 실천에 힘쓸 것.
이 조목은 서론으로 요지는 강학자의 실천을 강조한 것이다. 배우고 실천하지 않으면 배움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화서는 知行竝進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조선말기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화서학파들의 현실참여는 이런 화서의 실천교육의 영향에서 가능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⑧ 북쪽 오랑캐들(청국인)은 의관을 부숴 없애고 서쪽 귀신들은(서양인) 心術을 좀먹고 있으니, 마땅히 몸을 꼿꼿이 하고 다리를 세우며 마음을 밝히고 눈을 부릅떠 성현들의 가르침과 父祖의 유업을 추락시키지 아니하여야 할 것이니, 이것이 선비된 사람의 철두철미한 법문인 것이다.

   이 조목의 요지는 청나라와 서양 두 이적을 경계하고 물리쳐야 한다는 척사위정을 강조하고 있다.」
   화서의 교육사상과 교육목표와 목적은 모두 이 조목들에 집약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강계 9조목은 화서 문인은 물론, 화서학파가 강학소에서 강회할 때에 먼저 함께 낭송하였다고 한다. 화서가 경기도 양근군 벽계리와 강원도 홍천군 삼포리에서 강학활동을 통하여 양성한 문인은 460명으로 조사되었다.
   화서로부터 강학을 받은 화서문하생들은 다시 강학소(정사, 서사, 서재 등)를 열어, 강학활동을 통하여 후학을 배출하였다.
화서의 도학을 계승한 제자들도 강학활동을 통하여 인재를 배출하였다. 이들이 바로 척사위정 사상을 배워서 전국적으로 항일구국운동을 수행했던 그 많은 화서학파들의 주축을 이루는 인물이라 할 것이다.
   1846년(55세)에 화서는 장남 준을 시켜서 『주자대전집차』 20책을 편찬하였다. 이 책의 大旨와 강령은 화서가 집필하고 그 고증과 해석은 준이 집필한 것으로서 주자의 학설에 대한 한국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한 것이다. 『주자대전차의』에 실려있는 20여 家의 해석들을 통합하고 『어맹정의』와 같이 편집하여 화서와 그의 장남은 『주자대전차의집보』 121권 70책을 편찬하고, 다시 중요한 것만 뽑아 按設을 곁들여 『주자대전집차』 20책을 만든 것이다.
   1847년(56세) 여름에 화서는 서재 동쪽 산기슭에 제월대를 만들고 시를 새겨 교훈이 되게 하였으며, 이곳에서 경사를 강론하였다고 한다. 화서는 제자들과 산책하고 강학하면서 벽계구곡․노산팔경 지역의 명승지에 명옥정, 애내성중만고심, 쇄취암, 낙지암, 분설담, 석문, 일주암 등이라 명명하고 암각해 놓았다. ‘쇄취암’과 ‘애내성중만고심’은 주자의 「武夷棹歌」에서 따온 말로 주자가 활동하던 ‘武夷九曲’에 견주어 본 것 같다.
   1848년(57세)에는 『二程全書集疑』 수십권을 편찬하였다. 이것은 중암 김평묵을 시켜서 편찬토록 한 것인데, 화서는 “朱子의 학문이 전부 두 정자(명도, 이천)에게서 근본을 삼은 것이므로 그 전서가 당연히 『朱子大全』과 표리가 되어야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二程全書集疑』는 이러한 견해에 입각해서 편찬된 중요한 주해서이다. 그 해에 화서는 「心性理氣之辨」을 저술하였다. 화서는 여기서 “마음이라는 것은 사람이 지니고 있는 신명으로서 이와 기가 합쳐있고 동과 정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요, 성은 마음의 본체로서 이가 기를 타고 안정하고 있는 것이며, 정은 마음의 작용으로서 이가 기를 타고 동하고 있는 것이다”하고 하였다.
1850년(59세)에 화서는 강학규정인 「여숙강규」를 확정지어 수강자들에게 실천케 하였다. 1852년(61)에 화서는 『송원화동사합편강목』 60권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1852년 61세에 성재 유중교에서 편수를 시키고 그 뒤에 중암 김평묵에게 다시 수정케 하여 1863년 화서의 나이 72세에 완성되었다.
   1856년(65세)에 화서는 『周易傳義同異釋義』 2권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정자가 쓴 『傳』에 주력을 하였다가 朱子의 『本義』를 연구한 다음에야 성인들이 주역을 저작한 근본 뜻을 알게 되어 저술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화서는 「임천오씨태극설변」을 지었다.
1860년(69세)에 화서는 윤휴의 「중용혹난」에 대한 변을 지어 그 학설의 근본이 잘못되었음을 규명하였다. 1863년(72세)에 그는 「闢邪錄辨」을 지었다. 이 글에서 화서는 팔탄 남숙관․순양 안정복․염재 이정관 등이 변론한 양학설을 다시 수정하여 그 原位를 규명하였다. 1864년(73세)에 화서는 「나정암곤지기기의」를 지어 나정암을 조목조목 비판하려고 하였으나 건강이 감내하지 못하여 몇 단을 하지 못하였다.
   1867년(76세)에는 『華西雅言』이 편찬되었다. 이 책은 화서가 그동안 기록해 두었던 수고 중에서 대체에 관계가 있고 일용에 적당한 것을 발췌하여 문인들이 36편 891조를 만들어 강습자료로 쓰고자 만든 책이다. 이 책에는 화서학문의 정수가 되는 심오하고 긴요한 내용들이 실려 있다.
   1899년(몰후31)에 『華西集』 32권이 간행되었다.
   그 후 1986년에 『華西集』은 속집과 면암 최익현이 지은 「화서이선생신도비명병서」와 연보를 보충하여 영인 간행되었다.
화서에게 처음 내려진 벼슬은 1840년(49세)에 이조로부터 경사에 밝은 선비로 천거되어 제수된 ‘휘경원참봉’이다. 그러나 화서는 여기에 부임하지 않는다.
   그 후에 1864년(73세) 영의정 김좌진과 좌의정 조두순의 추천으로 1월에 화서는 장원서 별제를 제수받았으나 이어서 전라도사로 전임시키려하자 상소를 올려 사퇴하였다. 7월에 화서는 사헌부지평에, 그 해 겨울에는 사헌부 掌令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는다.
1866년(75세) 8월에 양적이 서울 마포 서강까지 들어오므로 장안이 피난길에 나서고 온통 혼란하였다. 화서는 달려가 국사에 협력하기 위하여 준비하였다가 안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중지하였다. 9월에 양적이 강화도를 함락하였다. 조정에서는 화서를 승정원동부승지에 특배하였는데, 국론이 일치하지 못하여 좌의정 김병학이 주청한 것이다.
   화서는 병든 몸으로 견여(수레)에 실려 상경한 며칠 후에 궐문에 나아가 상소하여 사직하고 겸하여 당면한 문제에 대한 의견을 진술하였다. 그리고 화서는 2일 후에 공조참판에 승진되었으나 사직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허락 받지 못했는데, 그 다음 날도 거듭 사직 상소를 올리는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소견을 진술하였다. 5일 후에 화서는 동총부부총관에 제수되었는데 또 사직 상소를 올렸고, 다시 5일 후에 또다시 사직 상소를 올려 마침내 체임을 허락받는다.
   10월에 화서는 동지의금부사에 제수되었는데, 사직 상소를 자신의 정치적 소견과 함께 올렸다. 당시 화서는 노쇠하여 봉직할 수 없으므로, 서응순의 편지에 답하여 거취의 의와 분문하여야 하는 도리를 다하려던 심정을 밝힌 것이다. 아울러 화서는 적이 퇴각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또 상소하여 소견을 진술하고 ‘만동묘’의 복향을 청하고 벽계로 내려갔다.
   1868년 3월 18일 77세로 서거하니, 벽계에서 10여리 떨어진 정배리 퉁점골에 임시로 장사지냈다. 그 후 2004년 3월 벽계 노산으로 반장하였다. 1869년에 고종황제는 지제교 조병숙으로 하여금 제문을 짓게 하고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끔 했다.
   전국 각도에 산재한 華西學派는 약 8000천여 명에 이르고, 각지방 유림들이 화서 이항로를 사모하여 봉안한 祠宇나 壇을 보면 경양사(충주), 경의재(평북 태천), 경현단(경기 가평), 노산사(경기 양평), 대통묘(경기 가평), 두류단(전남 신안), 봉산서재(강원 평창), 석가헌(충북 음성), 숭화묘(평북 개천), 운담영당(경기 포천), 일직당(경기 양평), 일치단(경기 가평), 자양영당(충북 제천), 천근사(황해 평산), 평호단(전남 완도), 한포서사(경기 가평), 화산단(전남 신안) 등 18곳이다.
   화서 이항로의 사당인 서종면 노문리 蘆山祠는 경기도지방문화재 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되고, 노문리 벽계의 화서 이항로의 생가는 경기도지방문화재 제105호로 지정되어 있다.
저서로 『華西集』, 『華西雅言』, 『朱子大全箚疑輯補』, 『宋元華東史合編綱目』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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