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탁

(李鐸, 1898-1967)
   독립유공자. 호는 東禹, 본관은 경주, 李五福의 첫째 아들이다. 1898년 6월 2일 용문면 연수리에서 출생하였다. 글방에서 한문을 수학하다 1916년 19세 때에 상경하여 경신학교 고등 보통과정에서 두 학기를 마치고 도중에 내려왔다.
   이탁은 1919년 3월에 만주로 망명하여 화서문인 박장호를 도총재로 하고 유인석 문인 조맹선을 단장으로 하는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같은 해 9월에 汪淸縣大坎子에 거주하는 공자교회의 유력자 김승과 협조하여 보황단을 조직하고 그 취지문을 함북 온성지방에 배포하여 단원을 모집하였다. 한편, 무산․간도지방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1920년대에는 북로군정서에 가입하여 사관연성소 특무반장에 임명되었으며, 청산리 독립전쟁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921년 9월에는 길림에서 교성대를 편성하게 되자 대장에 나중소, 부관에 최준형, 중대장 이범석, 그리고 소대장에는 이탁․이민화․금훈․남익 등이 임명되어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23년에는 길림성 거주 교포들의 교육기관인 樺林義塾에서 교사를 지냈으며, 1924년에는 체포되어 청진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1926년 12월 15일 가출옥하였다.
   그런데 그가 활동한 독립단의 배경을 살펴보면 그는 광복군 사령부 참모장으로 상해, 북경 등지에서 활약 중 1928년 상리에서 병사한다. 그가 만주에서 활동하면서 3월 하순 洪南杓와 1919년 9월부터 1920년 6월까지 활동한 것이 재판기록에 보인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의 소식이 전해지자 만주방면에서는 3월 13일 서간도와 북간도의 동포들이 봉기하여 국내독립운동과 호응하여 약 1백회의 시위운동이 벌여졌다. 이때에 노령방면은 한족회, 중앙총회를 중심으로 대한국민회의가 이루어지고, 노령․북만주와 연결되고 항일독립운동이 전개되면서 의군부까지 조직하고 많은 인사들이 지역마다 독립군을 편성하였다.
   국민회독립군과 군무도독부군의 편성으로 길림성, 왕청현에 군영을 설치하여 서일, 김좌진 등과 함께 군정부를 조직한 것이 북로군정서의 정신이다.
   한편 서간도 방면에는 유하현을 중심으로 경학사, 부민단 등을 통하여 거류 동포들을 모아 자치지구 한족최를 조직, 군사기관으로 군 정부를 설치하고 李靑天, 이범석 등을 교관으로 하여 신흥전문학교를 발전시켜 나아가 5월에는 대한독립단 결성을 보고 국내외의 조직망을 갖게 되면서 작전 모금활동도 하였다.
   따라서 겨울에 대한독립단 대표 김승학(화서학파), 한족회 대표 李鐸, 청년연합회 대표 안병찬 등의 활동으로 각 단체가 통합을 이룬다. 1920년 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에 광복군 참리부(임정내무부직속 통치기관)와 광복군 사령부(군무부 직속 군사기관)로 통합하고 각 지방에 광복군 군영을 설치하게 되니 이것이 ‘광복군’ 이란 공식명칭의 최초 사용되었다.
   이때 광복군 참리부장은 화서학파의 조병준(박문일 수제자), 사령부 사령장은 화서학파의 조맹선(유인석 문인)이다. 지방군영은 6개 지역이었다. 광복군은 국내서도 서울총영을 위시하여 도영, 군영, 별영으로 하고 국내외 연합으로 조국광복권을 전개해 도시도 하기로 했다.
   이밖에 남만주에는 독립군비단 광한단, 광복단, 흥업단, 태극단, 대지단, 신민단, 의민단 등의 많은 무장조직 단체가 무기를 구입하고 군대훈련을 통하여 민주지역에서 일군, 일경을 습격하고 혹은 국내잠입도 하면서 활동하였다. 3․1독립운동 후 조치에 있어서 국내진입 작전에 가장 활기를 띠었던 무장군은 대한독립단, 광복군, 군비단 등이었다. 이 시기에 李鐸은 독립군 무장전투에 참여한 후 병사란 기록이다.
1945년 서울대 사범대에 부임하여 국어학 강의하였고, 논문집으로 《國語學論攷》가 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대통령 표창, 1991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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