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계

(李元桂, ? -1388)
   무신. 시호는 襄平, 본관은 전주, 환조대왕(子春)의 1자로, 어머니는 한산이씨다. 태조고황제 潛邸時에는 의안대군 등 3형제의 우애가 매우 두터웠다. 태조고황제와 함께 누차 홍건적과 왜구를 토벌, 혁혁한 공을 세웠다. 1359년(고려 공민왕 8)에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와 노략질을 하자 이를 격파하여 2등공신이 되고 1361년 2차 침입 때 內府令으로서 安祐 등과 함께 博川에서 홍건적을 크게 무찌르고 다음 해에는 수도인 개경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워 1363년에 또 2등공신에 책록되었다.
   1375년(고려 우왕 1) 元帝가 고려 국왕으로 임명한 瀋王 모자가 반역자 金義의 무리를 거느리고 이미 선주에 도착하였다는 보고에 따라 국방경비를 강화할 때 동지밀직사로서 원수가 되어 서북방어의 임무를 담당하여 적도를 막아내었다. 1377년(고려 우왕 3) 왜구가 강화도에 침입하자 상원수인 羅世(1320-1397)와 함께 격파하였다.
   1380년(고려 우왕 6) 3월 왜구가 또 다시 光州․화순․능성을 침범하자 원수로서 나가 막아냈고 동년 8월 왜적이 배 500척을 진포에 매어 두고 양광(충청)․전라․경상 3도의 연해에서 노략질하자 원계는 楊廣道순찰사가 되어 출전, 邊安烈과 함께 3도 도순찰사인 태조고황제를 도와 남원 운봉에 이르러 대승하였다. 유명한 이 황산대첩에서 많은 포로와 말 1,600여 필을 포획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기를 노획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1388년(우왕 14) 고려가 요동을 정벌할 때 공은 조전원수로 출전하여 우군도통사인 태조 고황제의 회군에 처음에는 고려의 충신으로서 반대하였으나 마침내 회군에 협조하게 되었다. 태조고황제 개국 후 회군 2등공신에 봉해졌다.
   위화도회군 이후 태조 고황제 옹립의 기운이 높아지자 공은 대대로 은혜를 입어온 고려왕조를 배반할 수도 없고, 한편 형제로서의 효우를 버릴 수도 없는 진퇴양난이었다. 고려 충신이었던 원계는 충신불사이군의 신념을 지켜 네 아들에게 “너희는 나와 입장이 다르니 숙부(태조고황제)를 도와서 충효를 다하여라.” 유언하고, 다음의 필명시를 남기고 1388년 10월 23일 음독 자결하였다.
이 나라 땅 안에 이 몸 둘 곳이 어데일꼬,
죽어 지하에서 태백중옹을 만나 놀고 싶어라.
같은 처지에서 마름질[處身]함이 다르다 말 마오,
형만 땅에는 바다에 뗏배 띄울 일 없어라.
이 필명시는 1908년(순종 2) 18세기 종손 철재가 진정하여 왕의 윤허를 받아 무덤을 수축할 때 지석에 음각되어 있어서 재확인되었다. 처음에 陟山君에 봉해졌고 오랑캐 토벌과 왜구 토벌의 혁혁한 전공으로 다시 추충절의보리공신 삼중대광 완산군에 올랐다. 태조 고황제는 등극 후 完山伯으로 추봉하고 ‘襄平’이란 시호를 내렸다.
1872년(고종 9) 완풍대군 겸 영종정경으로 추증되고, 자손들은 4세봉군(四世封君) 겸 종정경 증직의 은전을 입게 되었다.
묘소는 함흥군 북주 동면 경흥리 귀주동 정릉 오른쪽 언덕에 있다. 묘비문과 신도비명은 순종 때 왕실지친이었던 完順君 李載完이 찬술하였다. 남북분단으로 묘전에서 향사를 올릴 수 없어 1984년 양평군 양서면 대심리 능곡에 興慶壇을 설단하고 음력 10월 첫 일요일에 세일제를 봉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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