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

(李挺豪)
   청해이씨 입향조. 자는 英彦, 초호 思心 후에 晩覺, 본관은 청해, 증호조참의 李淳禧의 첫째 아들이다. 만각은 어려서부터 법도를 엄격히 지키고 재주가 뛰어나 여러 선배들이 우러러보았다. 일찍이 성균진사에 오르고 1511년(중종 6)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을 거쳐 통훈대부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다.
   1519년 남곤․심정 등이 기묘사화를 일으켜 신진개혁을 서두르던 정암 조광조(1482-1519)와 김안로를 제거하여 유배시켰다. 그러나 김안로(1481-1537)는 1524년에 이조판서에 오르고, 그 아들 김희가 효혜공주와 결혼한 뒤부터 권력남용이 잦아 영의정 남곤과 대사헌 이항 등의 탄핵으로 풍덕에 유배되었다.
   1527년 남곤이 죽고 그 일파가 실각되자, 정언 채무택과 처를 시켜 동궁(후에 인종)의 안정을 위해 김안로를 불러들이게 하여 등용시키려함에, 섭정하던 왕비 윤씨와 대사헌 심언광(1487-?)이 합세하여 조정대신들도 모두 동조하였다. 그러나 사간 이언적이 불가함을 주장하다가 심언광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530년(중종 25) 김안로가 돌아와 우의정에 오르고 권력을 장악하여 정광필 이행 등을 귀양보내고 좌의정이 되자 바른말을 하는 조계욱 김극성 등을 귀양보내는 등 정국이 혼란에 빠졌다. 이때에 만각은 불의의 세력에 굴하지 않고 김안로의 죄를 극진히 논의하였다. 그러자 김안로가 안각을 함경도 경성으로 유배시켰다. 그 후에 김안로가 공포정치를 자행하고 마침내는 문정왕후의 폐위를 도모하다가 사사되자, 9년 만에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후 만각은 정사에 뜻을 두지 않고 분한 마음으로 양평 창대리에서 칩거하다가 별세하였다. 묘는 의정부시 민락동 덕수봉 아래 묘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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