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빈

(李尙彬, 1859~1919)
 
   항일의사. 자는 汝文, 본관은 전주인데, 1859년(철종 10) 기미 10월 3일에 경기도 여주군 개군면 주읍리(현 양평군)에서 부친 柄翼과 모친 성주이씨 사이에서 독자로 출생하여 1919년 3월 11일 별세했다.
   의사는 성종대왕의 다섯째 아들인 회산군(恬)의 13세손이니, 고조의 이름은 觀馨, 증조의 이름은 行遠, 고조의 이름은 達裁이다. 達裁가 일남일녀를 두었는데, 남에는 柄翼, 여에는 청주곽씨 곽한조에게 출가하여 壽榮을 낳았다.
   유학의 가무에서 태어나 한문을 수학하여, 도학과 의리를 생활의 기반으로 삼았다. 의사는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고 민족이 노예화되자 난국을 극복하기 위하여 노심초사하였다.
   1919년 전국적으로 항일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자, 의사는 곽수영, 김영규 등과 밀모하여 태극기를 제작하고, 도로변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 헌병분견대는 곡수 장터에서부터 주입리, 내리, 불곡리, 신내를 경유하여 양평으로 가는 도로변을 순찰하며 태극기를 철거하고 선량한 주민들에게 가진 만행을 저질렀다.
   1919년 3월 만세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양평 곡수 장터에는 3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公은 선두에서서 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잔악한 일본 헌병들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 金永圭(1856.11.1)지사는 장터에서 헌병대가 쏜 총에 맞아 전사하고, 그밖에 이원훈·이병훈·이제순·이철형·이봉규·이남규·이명규·이인규·박치영·김봉수 등 수 십명이 체포되거나 구타를 당하는 등 박해를 당하였다.
   시위군중은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공은 주읍리에서 추격하는 헌병대에 발각되어 총에 복부를 맞아 장이 터진 상태에서 집으로 모셨으나 그날로 순국하였다.
   의사의 시신은 가족이 수습하여 내리 산16번지 선영에 장사지냈다. 의사는 나주정씨 사이에서 딸 하나를 두고 아들이 없어서 辛聖根을 데릴사위로 하여 살다가 1936년 별세하였다. 辛氏가 가산을 정리하여 고향으로 떠나면서 논 300여 평을 남겼다.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신명을 바친 의사의 뜻을 기리고 원통한 한을 생각하며 85세의 딸과 종인들이 차례를 지내며 묘를 수호하고 있다. 85세 된 딸이 양자를 부탁하며 대를 계승시켜 줄 것을 간절히 부탁하여, 祥奎를 양자로 입후하였다.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같이 전사한 김영규지사는 1919년 8월 15일 애국장을 받았으나 함께 밀모한 이상빈 의사는 아무런 예우도 받지 못하고 있다. (개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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