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룡

(李承龍, 1853~1896)
 
   독립유공자. 의병장. 자는 秀雲, 호는 錦坡, 本貫은 청해이니, 靑海伯 襄烈公 李之蘭의 15대손이다. 지사는 1853년 계축 정월 17일에 양근군 동종면 대곡동(양평읍 대흥리)에서 부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겸 오위장 李殷錫과 모친 경주최씨 사이에서 6兄弟 중 4남으로 출생하였다.
   충효를 가훈으로 하는 전통의 가문에서 태어난 지사는 어려서부터 영달하고 명민하여 강개한 기절이 있었다. 그리하여 독서를 좋아하여 10세에 사서삼경을 읽었다. 또한 무서도 익히고 지리에도 관심을 가져 장차 유망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1866년 14세 때 병인양요시에는 나라가 위태로움을 당하였으니, 마땅히 나가서 싸워야 한다며 벽에다 ‘의병장 이승룡’ 이라 써서 붙이고 서울로 올라갔다. 당시 친척 중에 혜랑벼슬을 하는 이승목에게 찾아가서 “양병의 침입을 보고 백성으로서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나가 싸우게 하여주십시오.” 하였다. 이승목은 대원군에게 승룡의 기특함을 얘기하였다. 대원군은 “너 아니라도 능히 양적을 물리칠 터이니, 너는 고향에 내려가 학업을 열심히 닦고 군자의 도를 닦아 장차 훌륭한 일꾼이 되라”고 하여 그대로 내려왔다.
   1877년 25세에는 친구(?)가 안동부사로 부임하러 가는데 신변보호를 위하여 수행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친구가 감사한 뜻으로 타고 가라며 당나귀 한 필과 아버님께 드리라며 옷감 안동포 1필을 선사하여 당나귀에 싣고 문경새재를 넘어오는 도중 굶주려 쓰러진 한 가족 4명을 보고는 팔아서 쓰라며 당나귀를 그들에게 주고 걸어서 왔다.
   그 해에 무과에 급제하여 내직에 임명되어 다음해에 부호군에 승진되었다.
   1881년 29세에 忠北將에 임명되어 복무하던 중 다음 해 6월 9일 임오군란이 일어나 민겸호가 살해되자 그 시신을 거두어 아들인 민영환 집으로 호송하였다. 이로 인하여 민영환과는 교분이 두터운 관계였다.
   1885년 35세에 중추원 첨지를 거쳐 38세에 통정대부 강령현감 해주진관 병마절제도위에 임명되었다. 이 때에 강령하는 탐관오리의 착취로 민란이 발생하였는데, 민영환이 지사의 덕망과 지략을 잘 알고 고종에게 추천하여 임명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사가 부임을 사양하였다. 고종이 어전으로 지사를 불러 사양 이유를 불은 즉, 지사가 대답하기를 “황공하오나 백성들의 생활고가 막심한데다가 탐관오리의 착취와 헌납금 과잉징수로 민요가 일어났으니 통촉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고종은 즉석에서 헌납금 탕감을 윤허하고 속히 부임하여 위민정치를 하라고 하였다.
   지사는 강령현감으로 부임하여 백성들을 위안시키고 관속들의 민폐와 잡부금을 없애고 선정을 배풀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1890년 39세에 정월 이웃 고을 연안부에 민요가 발생하자 황해감사 오준영이 나라에 장계를 올려 지사를 민요수습 명사관으로 임명하였다. 지사는 5개 군 수령과 난민의 대표를 불러 시시비비를 상세히 조사하여 중립적 위치에서 사리를 판단하고 공정하게 처리하여 민요를 수습하였다.
   1892년 40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3년 거상을 다하고 상경하였다. 이 때는 1894년으로 전국에는 동학난이 일어나고 이로 말미암아 淸日兩國軍이 주둔하여 세상인심이 혼란하였다. 결국 6월에 청일양국군이 충돌하여 일본이 승리하고, 이를 등진 개화세력에 의해 변화가 무쌍하여 주권은 일본인과 그 주구들에 의하여 농락되었다.
   1895년 왜적과 창괴들에 의해 8월에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이어 유길준 등에 의해 단발령이 강제로 실시되었다. 공은 분통한 마음으로 즉시 상경하여 민영환을 만나 변괴를 통곡하고 민영환과 더불어 밤새도록 분통한 심정이 오고갔는데, 민영환이 ‘원수를 몰아내고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키는 길이 있을 뿐이다.’고 한 말을 듣고는 의병을 일으킬 결심을 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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