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훈

(尹承勳, 1549~1611)
 
   조선중기의 문신. 자는 自述, 호는 晴峯, 시호는 文肅, 본관은 해평, 사헌부감찰 尹弘彦의 아들로 양평군 강상면에서 우거하였다. 1573년(선조 6) 진사가 되고 그 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응교로서 선유어사를 겸하여 전란의 뒷수습에 공을 세워 1594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고, 곧 이어 형조참의, 서로조도사가 되었다.
   이때 蕃胡가 난을 일으키자 토벌할 것을 조정에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병사 이수일을 시켜 중군을 이끌고 세 갈래로 진격 소탕하였으니 어유간에서 풍산보에 이르는 300여리에 번호의 무리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의 공로로 정헌대부의 품계에 올랐다. 호조참판, 대사헌을 거쳐 1597년(선조 30) 사은사로 明에 다녀온 뒤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 후 병조판서를 거쳐 1601년 우의정으로 승진되었으나, 이듬해 이항복을 신구하려다 3사의 탄핵으로 면직되었다. 이후 다시 기용되어 1603년 좌의정에 이어 1604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선조에 대한 존호의 결정에 소홀하였다는 좌의정 유영경의 모함으로 한때 파직되었으나 곧 신원되어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묘는 강상면 화양리의 높이 170cm의 석축단이 마련된 해평윤씨 묘역 내에 남향하여 있다. (강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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