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길

(尹承吉, 1540~1616)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子一, 호는 南岳, 시호는 肅簡, 본관은 해평, 사헌부감찰 尹弘彦의 아들이다. 1561년 사마시와 생원 진사시를 거쳐 1564년(명종 1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 정자, 예문관 검열, 춘추관 기사관을 역임했다. 1568년(선조 1) 승정원 주서를 거쳐 그 다음해에 성균관 전적, 교수와 형조 병조 예조 정랑을 역임했다.
   1572년 경기도 암행어사에 임명되어 도내 수령의 잘못을 조사하여 기강을 바로잡고 민정을 고루 살피었다. 그 후에 사헌부 장령, 사간원 사간, 사헌부 집의 등 여러 요직을 역임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는 귀성부사 겸 귀성진병마첨절제사로서 병사모집과 군량미조달 등에 공을 세우고, 이듬해 내직에 들어와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었다.
  1594년 강원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가 되어 흉년으로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고 行伍之法을 실시하여 오가상조의 협동정신을 기르고, 장정들을 기효신법으로 훈련시켜 명나라 지휘관으로부터 높이 평가를 받았다.
   1595년 평안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 평양부윤 · 도순찰사를 역임하고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599년 한성부 우윤과 동지의금부사로 임명되었고, 이후 공조참판과 오위도총부 부총관으로 전보되었다. 1601년 사헌부 대사헌, 형조참판, 1603년 형조판서로 자헌대부가 되었다.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고, 1907년 의정부 좌참찬에 임명되고, 1908년 정헌대부로 승급되었다. 1609년(광해군 1) 국가 원로로 기로소에 들어갔다. 1612년 익사공신에 녹훈되어 숭정의 품계에 오르고 해선군에 봉해지고 판의금부사를 겸했다. 1515년 과거 시관, 사첨시제조가 되고 1616년(광해군 8) 11월 서울 묵정동 자택에서 77세로 별세하였다. 조정에서는 예관과 조관을 보내 조문하였고 상사를 도왔다.
   1676년(숙종 22)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묘역은 용문면 조현리 산30-1번지 산기슭에 위치한다. 묘 앞에는 묘비와 상석, 향로석, 그 좌우에는 동자석, 망주석, 문인석이 각각 배치되었고 양평군 향토유적 제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용문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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