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

(呂運亨, 1886~1947)
 
   독립유공자. 정치가. 호는 夢陽, 본관은 함양, 呂鼎鉉의 첫째 아들로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에서 출생했다. 우무학당 등에서 한학을 공부한 후 1907년 고향집에 광동학교를 세우고 신교육에 헌신했다. 그리고 강릉에 초당의숙을 세워 민족의식을 초취하던 중 국권이 피탈되고 학교가 폐쇄되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선교사 클라크를 따라 서간도의 新興武官學校를 견학하며 국외에서의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학교를 중퇴, 1913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남경 금릉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다가 상해로 가서 1918년 신한청년당을 발기하여 김규식을 파리평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였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는데, 일본정부는 이를 자치운동으로 회유하고자 그 해 11월 그를 도쿄[東京]로 초청하였으나 오히려 장덕수를 통역관으로 삼아 일본의 조야 인사들에게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1920년 영국식민지정책을 비난하다가 영국경찰에 체포되어 일본경찰을 경유하여 본국에 압송되어 3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1933년 출옥,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였는데 1936년 신문이 일제에 의하여 정간되자 사임한 후 1944년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안재홍 등과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9월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으나 우익진영의 반대와 미군정의 불인정으로 실패하였다. 12월 조선인민당을 창당, 1946년 29개의 좌익단체를 규합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였으나 반대하여 탈퇴하였다.
   또,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였으나 극좌 · 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좌우합작운동을 추친 하던 중 1947년 서울 혜화동 사거리에서 7월 19일 극우파 韓智根(=한현우)이란 19세 소년으로부터 2발의 권총사격을 받고 피살되었다. 2005년 3·1절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追敍되었다. (양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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