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헌수

(梁憲洙, 1816~1885)
 
   조선조 무신. 화서 문인. 자는 敬甫, 호는 荷居, 시호는 忠莊, 본관은 남원이다. 1816년(순조 16) 용문면 광탄리에서 수봉관 梁鍾任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1828년 13세에 화서 이항로를 찾아가 성리학을 배우고, 1848년 무과에 급제하고, 이듬해에 선전관직으로 관직에 오르게 된다.
   1851년 참상관(참상관; 6품)으로 승진하면서 훈련판관, 경력, 첨정 등 무인의 요직을 거치게 되었다. 1854년 평안도 동부의 희천군수에 임명되어 외직으로 나가게 되었다. 4개월이 경과되어 모친상을 당하여 귀향하게 되었다.
   하거는 1858년에 어영청 초관을 거쳐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선전과겸 사복장을 역임하고, 1859년에 갑산부사로 부임하여 외직으로 나가게 되었다. 여기서 민폐를 시정하다가 남병사의 모함을 받았으나 비변사가 양헌수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남병사를 처벌한 일이 있다.
   1862년 봄에는 조정에 민폐에 대한 건의안을 제출하였다. 그 후 1864년 하거는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 그해 7월에 폭우와 태풍으로 섬 전체가 흉년이 들었다. 하거는 봉미 2천석을 출연하여 9만 600여 명을 구제하였다. 그 다음 해에 하거는 전 제주판관의 탐학한 죄를 고발하여 엄벌에 처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하거의 청렴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1866년 9월에는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어 공방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프랑스 함대의 침입을 대비한 순무영이 설치되자 천총에 임명되었다. 조정에서 양헌수로 하여금 프랑스함대를 토벌케 하였는데, 하거는 출전에 앞서 양화진 환송식장에서 흥성대원군에게 당면한 난국의 수습책으로 양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스승인 화서를 불러 예우를 하여 重用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하거는 500명의 병력으로 정족산성에서 매복작전을 펴서 프랑스 함대를 격퇴시키고 승전한다. 1867년 금위대장을 역임하였다. 1876년 오위도총부 도총관, 1879년 지중추부사 겸 삼군부사, 1884년 공조판서, 1887년 춘천부 유수 겸 독련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888년 11월 22일 별세하니 경기도 과천 남면 부곡리에 안장하였다가 양평군으로 이장하였다. 신도비는 용문면 광탄리 택승정 옆에 위치하고 있다.
   저서로 『荷居集 』이 있다. 하거의 행장은 이조판서 김윤식이, 신도비명은 대제학 한장석이, 묘지명은 이조판서 이재완과 동부승지 이건창이, 시장은 이조판서 김영수가 지었다. 묘는 양평군 향토유적 제12호로 지정되었다. (용문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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