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흠

(愼光欽, 1768~1833)
 
   효자. 자는 大顯, 본관은 거창, 愼麟瑞의 셋째 아들인데, 당숙인 國瑞에게 입양하였다. 엄한 가정에서 수업하다 장성하여서는 스승을 모시어 수학하여 널리 배우고 시오한 연구로 경사에 밝았다.
   부모를 효도로써 섬기되 『小學』의 가르침대로, 그 마음과 몸을 편안하게 하기에 힘쓰고 음식과 의복을 잘해드렸다. 겨울에는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드렸다. 새벽이면 살펴서 방이 차아구면 불을 때서 따뜻하게 해드렸다. 孝友敦睦은 일생을 두고 일관되게 하였으니, 부모에 효도함이 하루도 한시도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1812년 3월 어머니가 81세로 하세하자 서종면 서후리 선영에 장사지냈다. 묘소가 집에서 1백리가 넘기에 조석으로 모실 수 없어 삭망이면 반드시 서울에서 서후리 묘소까지 도보로 와서 성묘하고 며칠을 묘하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살림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서울에서 서후리 묘소 아래로 이주하게 되었다.
   묘하로 이주해서는 매일 조석으로 눈이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부나 묘에 올라가 슬픔을 다하였다. 마침내 서후리 은행나무 아래 집터를 마련하여 가옥을 신축하니 때는 1813년이었다. 그래서 그 다음 해에 온 가족이 이주하게 되었다. 돌아가신 어버이를 받들기 위함이었다.
   학문 연구에 정진하고 효오돈목에 노력하기를 평생토록 한결같이 하였으니, 일동일정에 엄정하고 주자의 예법을 배워서 그대로 실천하여 모범이 되었다. 그래서 향리 사람들이 학행이 군자라고 칭찬하였다. 또한 항상 손에는 성현의 책이 떠나지 않았고 세도 있는 집에 드나들지 않아서 淸修高節하고 博學多識하여 선비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서종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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