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윤

(愼景尹, 1624~1704)
 
   거창신씨 입향조. 문신. 자는 仲任, 호는 明谷, 본관은 거창, 전설사 별제 愼英振이다. 부인은 북한강 건너 남양주군 화도면 금남리 白月의 함평이씨 구원 이춘원(1571~1634)의 손녀요 판관 楚望의 딸이다. 楚望은 서종면 도장리 國老所의 함평이씨 입향조 李之星의 아버지 난계 楚奇와는 형제지간이다.
   1624년(인조 2) 태어나서 1657년(효종 8)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660년(현종 1) 추천으로 고령현감을 지냈다. 1669년 후에 동지사로 燕京에 세 번이나 다녀왔다. 동지사 서장관으로 연행시에는 병자호란의 치욕을 설욕할 뜻을 품고 산천의 험준, 지형 지물, 군비상태, 요새 등을 은밀히 기록하여 두고 북벌 계획을 준비하였다. 후에 북벌을 추진했던 李浣이 명곡의 지모장략에 탄복하여 칭찬하였다.
   명곡이 연경에 다녀온 후 통정대부로 승계하고 숙천 · 남양 · 영해 · 경원 · 해 府使와 제주 · 안동 목사를 역임하였다. 제주목사로 재임기간에는 문맹한 백성을 위하여 학교를 세워 학문과 예법을 가르치고 한편 運壽堂을 건립하여 무예와 병법을 가르쳤다.
   또 안동부사로 재임시에는 흉년으로 군민이 굶어죽고 기아에서 허덕이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흉년에 대비하여 평시에 양곡을 수만석 저축하여 두었다가 흉년이 들면 병든 자나 가난한 자에게 풀어서 재앙을 면하게 하였다. 이에 군민들이 칭송이 자자하였다. 경주부윤 재임시에도 많은 치적을 남겼다.
   1694년(숙종 20) 공조참의를 제수 받았으나 취임하지 않고 퇴임하여 황해도 금천군 서북면 백석리 대명동에 거주하였다. 1703년(숙종 29) 가선대부에 오르고, 1704년 호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중추부사 겸 의금부사를 배명받았다. 그해 4월 13일에 졸서하였다. 숙종이 슬퍼하여 예관을 보내 치제하고 사제문을 내렸다. 최익현 등 유림이 추모하여 금천사를 지어 봉안하고 후세의 모범을 삼으려 하였으나 서원철폐령으로 무산되었다.
   풍수에 식연이 있는 명곡은 부친(英健)의 묘를 쓸만한 명당자리를 찾아 방방곡곡을 찾아다녔다. 서종면 서후리 섬곡(두꺼비골)에 이르러 산을 둘러보다 지형이 절묘함에 감탄하고 ‘可活吾孫之地’라 하고는 자리를 정하였다. 부친이 별세하자 그 자리에 부친을 장사지내고 묘하로 이주하였다.
   금천에서 서후리로 이주한데는 부인 함평이씨의 봉사제와 지혜가 작용하였음을 간과할 수 없다. 1704년(숙종 13)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下世하니 두터골(厚谷) 앞산에 장사지내고 후손이 世居하였다. 저서로 『明谷集』전한다. 묘는 서종면 서후리에 있다. 신도비문은 면암 최익현이 지었다. (서종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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