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건

(愼英健)
 
   효자. 자는 子順, 본관은 居昌, 守身의 아들이다. 전설사별제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랐으나 광해군 때에 인목대비 폐모론에 관여했다고 김경징(1589~1637)이 모함하여 유배된 일이 있다.
   그러나 경징의 부친 김류가 愼모를 허위로 죄에 얽어 넣은 사실이 폭로될 것이고, 무고한 관원을 유배시킨 조정에서 물의가 발생하면 도리어 자기에게 불리할 것을 예측하여, 김경징을 문초질책하고 속히 귀양을 석방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불과 2년 만에 사면되어 귀가하였다.
   그 후 복직하라고 친지들이 권고하였으나 일체 벼슬을 사양하고 몸을 지키며 거문고로 세월을 보냈다. 본래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하여 권문에 출입하지 않고 흔들림이 없었다. 파당의 폐해와 반정공신의 논공행상 등 혼란한 정국에 더 이상 휩싸이지 않으려는 것이다.
   전하는 기록에 보면,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이 지극하였다. 병든 어버이를 모심에 지성으로 간병하였고 병환이 위증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입에 피를 흘려드렸다. 돌아가신 후에는 상례에 있어서 일호라도 어긋남이 없도록 하였으며 일거일동이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그러므로 향리 사람들이 추중하였다.
   묘는 아들 명곡이 이미 자리를 잡아 놓은 서종면 서후리 중봉에 장사지냈다. 후에 호조참판 오위도총부 부총관 동지중추부사가 추증되었다. 묘 자리에 대하여 求山으로 방방곡곡을 헤매던 명곡이 말하기를 “百代千孫之地, 可活吾孫之地”라 하였다고 전한다. (서종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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