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성

(徐渻, 1558~1631)
 
   문신. 자는 玄紀, 호는 藥峯, 시호는 忠肅, 본관은 달성, 徐嶰의 아들, 李珥 · 宋翼弼의 문인이다. 1586년(선조 19) 별시문과에 급제, 1592년(선조 25) 병조좌랑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 호소사 黃廷彧의 종사관으로 함북에 이르러 두 왕자와 황정욱 등이 포로가 되자 혼자 탈출했다.
   왕명에 따라 행재소에 이르러 병조정랑, 직강이 되고 명나라 장수 유정을 대접했다. 그 후 암행어사에 이어 제용감정에 특진, 이어서 5개 道의 관찰사와 3조의 판서를 거쳐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화옥에 연루되어 11년간 유배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형조판서에 복직되고, 다음해에 대사헌에 제수되고 경연과 성균관사를 겸하였다. 한효순의 간당이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를 폐한 죄를 노박할 때에 그 제자와 아들 근척을 귀양 보내니 백성들이 통쾌하게 여겼다.
   1624년 이괄의 난과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각각 왕을 호종했다. 이린기 등과 남지(기로회)를 조직, 역학을 토론했고 서화에도 뛰어났다. 1628년(인조 6)에 반역옥사를 다스리어서 승록대부를 더 받고 다시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약봉은 양서면 대심리 승지골에 상심정을 짓고 시인들과 세월을 보내면서 심신을 수련하여 양평군과 인연을 가지게 되었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대구 귀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藥峯集』이 있다. 묘는 포천군 포천읍 설운리에 있다. (양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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