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8월 3일 이후 양평군민은 평온하여 시위운동을 하지 않음을 유감으로 여겨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독립선언서인 “우리 조선민족은 일본의 굴레를 벗어나서 분기하여 군중과 함께 독립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는 취지를 기재한 문서 수십 매를 뿌렸다. 대한 독립회 명의로 된 즉 “지금 각 경찰서에 형벌을 당하고 있는 형제자매들을 미련한 무리처럼 보고 또 고종황체 폐하를 암살하였다. 2천만 동포는 나라 없는 백성이 된 지 10년을 능욕 당하였다. 나라 없는 노예가 되어 사는 것보다는 오히려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총, 칼 밑에서 죽는 것이 낫다. 독립의 시기는 왔다. 이 시기를 놓치면 다시 만나기 어렵다. 맹렬히 분기하여 민족을 단결하고 독립기를 높이 게양하여 형벌 속에 있는 형제자매를 구하고 역적의 무리를 잘게 토막 쳐 우리들의 마음속을 상쾌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동포여! 이 시기를 잃지 말고 독립기를 번득이고 맹렬히 분기하라”는 취지를 기재한 격문 수십 매를 뿌렸다.
지사는 양평군민들을 선동하여 많은 군중들과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한 것이다. 8월 24일 갈살면 양근리 등 장날을 이용하여 군민 1천여 명의 군중에게 ‘조선민족은 이 기회에 독립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는 취지의 정치연설을 강행하였다.
이렇게 하자 일본 헌병대는 지사를 질서안녕을 방해한다 해서 보안법 위반이란 죄를 씌었다. 그는 양평 헌병분경소에 인치되어 조사를 받았다. 지사는 2차 선고형에 불복하고 항고하였으나 기각되었다. 또한 우편소장 집과 면장을 끌어내었다는 것으로 경성지방법원 경시부의 징역 8월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단월면)
곽영준
(郭英俊, 1899~?)
독립유공자. 3.1운동. 곽영준은 단월면 부안리 271번지 출신이다. 21세로 농업에 종사하는 천도교다. 3·1운동에 적극 참여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8월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같은 고향출신 이신규(기독교인)와 8명이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