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경우

(權景祐)
 
   조선초기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子綏이다. 判官 權耋의 아들이며, 대사헌 權景禧와 이조정랑 권경유(權景裕)의 형이다. 1470년(성종 1)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으며 뒤에 예문관 봉교에 승진하여 사관 선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듬해에는 천추사의 검찰관으로 중국에 다녀오면서 통사 조종손 등의 밀무역을 검찰한 공로로 4계급 승진하여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이어서 홍문관 수찬으로 옮겨 제주경차관으로서 제주도민의 궁핍현상을 지적하고 그 대책의 강구를 요청하였다. 이듬해 다시 사간원정언이 되어 임사홍(1445~1506)이 국정을 농락함과 간사하기 이를데 없음을 규탄하였다. 한편 국왕의 수렵활동에 있어 승지와 사관의 대동을 금하자 그 불가함을 주장하고 국왕의 거동에 대하여는 사소한 것이라도 기술하게 하였다.
   1482년 홍문관 부교리로 있을 때 당시의 왕비 윤씨를 폐비시킨 처사의 잘못을 간언하다가 파직되었다. 1486년 직첩이 환급되어 예관으로 복직되고 이어서 사간으로 평안도병마절도사 이조양의 군비소홀과 군공사칭을 탄핵, 면직시켰다. 그 뒤 형조참의, 동부승지, 우승지, 도승지를 역임하고 1498년(연산군 4) 사헌부대사헌에 올라 사찰 건립의 불가함을 논하고 정승조 · 이창신 등을 규탄하였다.
   그러나 그 해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동생이 주모자로 처형되었고 그도 연루되어 강릉부 관노로 배속되었다. 성품이 강직하여 권신에게 구차하게 아부하지 않았으며 직무를 공정히 다스려 많은 사람들이 감복하였다. 중종반정으로 적물 가산이 환급되고 죄명도 신원되었다.
   묘는 지평리 수곡2리 통로마을 수곡서원 서편에 위치한다. 신도비는 묘소 입구에 위치하며 묘소는 능선을 따라 약 50m 오른 곳에 남향으로 조성되어 있다. 신도비는 이수와 장방형 대좌를 갖추고 있으며, 동-서 향으로 서 있다. 이수와 비신은 괴운문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비문의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다. 장방형대좌의 상부는 몰딩으로 처리되어 있다. 권경우를 제향하는 수곡서원은 양평군 향토유적 제20호로 지정되었다. (지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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