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이식도 조부 묘를 전라도 고부에서 경기도 양평 백아곡(현재의 양평군 양동면 쌍학리)로 이장을 하게 됩니다. 이식은 당대의 명풍수가로 이름 높던 이의신을 비롯하여 명나라 사람 두사충 등 여러 유명한 풍수가들의 의견을 듣고 조부인 이섭의 산소자리를 잡았습니다.
이식은 자신의 문집인 《택당집》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한문으로 된 원문을 완역한 그대로 발췌)
<아, 처음에 우리 덕수 이씨(德水李氏)가 대대로 서경(西京)에서 벼슬할 적에는 묘지가 대부분 덕수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8대조인 춘당공(春塘公)이 한양(漢陽)으로 옮겨 오면서 파주(坡州)의 임진산(臨津山)에 장례를 지냈으며, 강평공(康平公)과 군사공(郡事公)을 비롯해서 여러 종인(宗人)들 역시 동향(同鄕)의 다른 산에 장례를 치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뒤에 현조(玄祖 5대조)인 연헌 선생(蓮軒先生)과 고조인 용재 선생(容齋先生)과 증조인 도사(都事) 부군(府君)이 모두 면천군(沔川郡) 창택산(滄澤山)에 안장되었으며, 분종(分宗)의 형제들도 많이 부장(祔?)되었으므로, 세상에서 이씨네 종족의 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아, 융경(隆慶) 4년(1570, 선조 3)인 경오년 1월 2일에 왕고(王考) 부군이 호남의 고부(古阜) 우일장(雨日莊)에서 거처하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우일은 바로 왕고의 외가(外家)가 있는 시골이었다. 이에 선고(先考) 부군이 약관(弱冠)이 채 안 된 나이에 면천(沔川)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를 수도 없기에, 마침내 외가의 묘역(墓域) 근방의 산기슭에 묘소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뒤로 몇 년이 지나서 당숙(堂叔)인 모(某)가 술사(術士)의 말을 곧이듣고는 자기 부친의 묘소를 왕고(王考)의 묘소 후미의 가파른 언덕에다 이장(移葬)을 하게 되었는데, 고랑을 파서 물을 흘려보내는가 하면 묘소의 터를 크고 높게 쌓고 석상(石像)을 설치하여 제압을 하였으므로, 선부군(先府君)이 극력 다투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선부군이 봉분의 흙을 한 길 남짓 정도 더 쌓아 올려서 뒤에 있는 묘소의 높이와 같게끔 하였으나, 이제는 객토(客土)가 곧잘 무너져서 해마다 다시 쌓는 일이 계속되었다.
선부군이 이를 대단히 한스럽게 여기면서,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언덕이 무너져 사태가 나고 큰물이 져서 씻겨 나간 나머지 묘소가 파헤쳐지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개장(改葬)할 일을 의논하기 시작하였으나, 대부인(大夫人)이 이미 노쇠한 까닭에 마음을 상하게 해 드릴까 걱정하여 속히 일에 착수하지 못하였다.
만력(萬曆) 을사년(1605, 선조 38) 7월 28일에 대부인이 여강(驪江)의 농장에서 별세하였다. 이에 장지(葬地)를 물색하였으나 면천에는 비어 있는 땅이 없고 임진산은 거리가 워낙 멀어 아예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때 남쪽 변방에 아직도 왜적이 난리를 일으킬 걱정이 남아 있어 사람들이 피하고 있었으므로, 마침내 마을에서 북쪽으로 2리(里)쯤 떨어진 원통동(元通洞)에 터를 잡고 장례를 행한 뒤에 왕고의 묘를 옮겨 합장(合葬)을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일을 착수하기에 앞서 원통동을 살펴보러 가자 또 토호(土豪)들이 위세를 부리고 핍박을 하면서 송사(訟事)를 벌이려고까지 하였으므로, 결국 천장(遷葬)하는 일을 행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선부군이 항상 안타까운 심정으로 가족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조부를 계승한 소종(小宗 장자(長子)가 아닌 자손의 계보를 말함)으로서, 다행히 세시(歲時)에 제물(祭物)을 바쳐 올리면서 그런대로 죄를 지어 후회되는 일이 없이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버이의 묘소를 각각 다른 곳에 모시게 되고 말았다. 게다가 나의 자손이 또 허약하기만 하니, 어떻게 이를 제대로 모시면서 지킬 것이며 예법에 합당하게 할 수가 있겠는가.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날 경우, 너희들 생각을 하면 걱정스럽기만 하다.” 하였다.
당시에 내 나이가 28, 9세쯤 되었다. 그런데 나는 어려서부터 병약(病弱)한 체질인 데다가 세상에 대해서 염증을 느껴 흥미가 없었으므로,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기는 했지만 벼슬살이에 적성이 맞지 않아 경강(京江)을 왕래하면서 자적(自適)하지 못한 채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는 항상 한 문공(韓文公 한유(韓愈))의 시 가운데 “살아서는 내 밭을 갈아서 밥을 먹고, 죽어서는 내 고향 언덕에 묻히리라. 글을 지어 내 도를 전하면 그저 그뿐, 사관(史官)의 붓에 의지하여 드리워지진 않으리라.[生兮耕吾疆 死也埋吾陂 文書自傳道 不仗史筆垂]”라는 구절을 외우곤 하였는데, 이를 읊고 있노라면 미상불 개연(慨然)한 심정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언젠가 이와 비슷한 심정을 선부군에게 토로하면서 말씀드리기를, “어떻게 널찍하고 한가한 곳을 하나 얻어서 이런 생활을 해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했더니, 선부군도 이 말을 수긍하면서, “그런 곳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너의 그러한 뜻을 나는 막을 생각이 없다.” 하였다.
아, 계축년(1613, 광해군 5) 8월에 부군(府君)이 악창(惡瘡)을 앓아 거의 위태로운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나의 손을 잡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올해에는 기필코 장지(葬地)를 정해 놓으려고 하였는데, 이렇게까지 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느냐. 너는 내가 죽거든 원통동에다 임시로 매장을 하고, 상복을 벗은 뒤에 널리 좋은 묘역을 찾아보도록 하라. 그리하여 점차적으로 저축(貯蓄)을 하면서 서서히 이장(移葬)을 할 것이요, 고비(考妣)의 묘소를 천장(遷葬)하는 일도 그동안 의논했던 대로 행하도록 하라.” 하였으므로,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일단 약속을 드렸다. 그 뒤 12일이 지나서 부군이 마침내 별세하였는데, 빈소(殯所)를 마련한 뒤에 내가 아우인 재(材)와 의논하며 말하기를, “지금 시대의 상황이 어렵고 집안이 빈한한데 자당(慈堂)이 또 연로하시니,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될지 보장할 수가 없다. 만약에 묘역을 얻는다면 하필 임시로 매장을 하고 뒷날을 기다릴 것이 있겠는가. 내가 듣건대, 음덕(陰德)을 쌓은 사람은 반드시 길지(吉地)에 묻힌다고 하니, 어찌 성의를 다해 찾아보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묘소를 고른 결과 지평현(砥平縣) 백아곡(白鵶?)의 땅을 얻게 되었으므로, 이해 11월 6일에 부군을 간좌(艮坐)의 언덕에다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갑인년에서부터 을묘년(1615, 광해군 7)까지 차례로 왕고비(王考妣)의 묘소를 천장하여, 2월 13일에 감좌(坎坐)의 언덕 아래에다 합장(合葬)을 하였으니, 대개 경오년에서부터 금년인 을묘년까지 무릇 46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야 묘택(墓宅)이 비로소 안정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시말(始末)의 내용을 개략적으로 서술한 것인데, 후손들이 이런 사실을 알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이렇게 적어 놓는 바이다.>
-택당선생 별집 11권 계산지 서문-
그 산을 보면, 관동의 오대산(五臺山) 이북에서 뻗어 내려오다가 지평의 경계에 이르러서 서쪽으로 휘돌아 우현(友峴)이 되었고, 또다시 방향을 돌려 악치(惡峙)와 지사(池寺) 등의 고개를 이루었다. 이곳은 모두 큰 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불쑥 일어났다가는 납작 엎드려 있기도 하고 함께 치달렸다가 사방으로 흩어지기도 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평지와 깊은 골을 뚫고 지나와서는 다시 방향을 동쪽으로 꺾어 갑자기 솟구쳐 올라 마산(馬山)이 되었으며, 여기에서 곧바로 서북쪽으로 가로막힌 산 가운데에서 한 가닥 능선이 뽑혀 나와 왼쪽으로 방향을 돌리면서 아곡(鵶?)을 이루었다.
이곳은 다섯 개의 봉우리가 일어났다 엎드렸다 하는 가운데 여러 구릉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오른쪽으로 한 가닥 장강(長岡)의 능선이 마치 허리띠처럼 휘둘러 산의 얼굴을 에워싸 보호해 주고 있다. 그래서 어쩌면 본집이 낙성된 뒤에 사랑채들이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높은 관원이 궤안에 기대어 있을 때 의장대(儀仗隊)가 도열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사방 주위가 그윽하고 아늑해서 다른 곳과는 기상이 매우 다르니, 여기가 바로 묘지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그 너머 바깥에는 넓은 평원이 수십 리에 걸쳐 주위를 둘러싸고 있으며, 아곡 사면으로는 또 여러 산들이 쫑긋쫑긋 치솟아 마치 고리처럼 이어져 호위하고 있으므로 이를 쳐다보노라면 하나의 큰일산과 같은 느낌을 갖게도 한다. 우현 동쪽 능선이 다시 방향을 돌려 죽장(竹杖)과 구령(九嶺)과 악치를 이루고, 서쪽 능선은 다시 휘돌아 서화현(西華峴)과 대소의 송치를 이루는데, 그 두 개의 산등성이가 들판에서 합세하여 동남쪽에서 단정하게 아곡의 어귀를 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좌우로는 또 여러 산봉우리들이 서로 교차하여 빗장을 채우면서, 마치 사람이 손바닥을 들어 손가락을 엇거는 것과 같은 형세를 취하고 있으며, 백운산(白雲山)이 그 남쪽에 떨어져서 서로 이어지려 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 안쪽으로는 다섯 개의 개울이 또 동쪽과 서쪽의 여러 산으로부터 흘러 내려와서 골짜기를 휘감고 빠져 나와서는 큰 내를 형성한다. 그리하여 두 산이 교차해 있는 그 사이를 쏟아져 내려와 종횡으로 10여 리를 흘러가는데, 어디를 향하는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아곡의 내부에는 개울이나 시내는 없고 대여섯 곳에서 샘물이 솟아 나와 밭두둑 사이로 흩어져 들어가고 있다. 어떤 이는 이 물을 끌어와서 연못을 만들기도 하였는데, 큰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는 법이 없다.
경사(京師)로부터 관동(關東)으로 향하는 한 줄기 큰 길이 뻗어 있는데, 그 길이 혹 작은 갈래로 나뉘어지면서 골짜기의 앞뒤를 뚫고 지나가기도 한다. 산에 의지하고 물길을 따라서 대여섯 곳의 촌락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곳에 사민(士民)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그래서 이웃 마을끼리 서로 도와 주고 길손을 정답게 맞아 주고 있기 때문에, 산골짜기가 외따로 떨어져 있어 적막한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한다.
이를 종합해 보건대, 아곡의 땅으로 말하면 토질이 굳고 물이 맑으며 바람이 온화하고 지세가 그윽하니 묘역으로는 참으로 합당한 곳이라 하겠으나, 다만 사람을 즐겁게 할 만한 높은 산봉우리라든가 물이나 나무숲 같은 뛰어난 경치는 찾아볼 수 없는 곳이라 하겠다.
아, 나는 하늘로부터 형벌을 받은 사람이다. 살아 계실 때에는 제대로 봉양하지 못하였고, 돌아가셨을 때에는 또 따라 죽지 못하였다. 그리고는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목숨만 부지하면서 무지몽매하게 행동을 할 따름이었으니, 외진 산골의 금수(禽獸)와 다를 것이 별로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그저 골짜기 어귀에다 집 한 칸을 지은 뒤에, 산에 가서 나물 캐고 들에 나가 밭을 갈아 제사 음식이나 마련하고, 세시(歲時)에는 노소(老少)를 이끌고 묘소 앞에 나아가 둘러서서 참배를 할 뿐이요, 그리고는 방에 물러나 엎드려서 고금의 문자를 열람하고 스스로 참회하며 이 한 몸을 마칠 생각이다. 그러니 또 어느 겨를에 기이한 문자를 뽑아 내어 사치스럽게 이목(耳目)이나 즐겁게 하는 일을 일삼음으로써 불효의 슬픔을 더욱 중하게 할 수가 있겠는가.
또 오세준(吳世俊)은 감혈(坎穴)에 대해서 논하기를, “처음에 감혈의 봉우리가 일어날 때 홀로 우뚝 치솟더니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위로 날아올랐다가 박자에 맞추어 땅을 밟고 내려와서는 머리를 숙여 감(坎)을 이루고 혈에 떨어져 와(窩)를 이루었다. 좌우의 신사(神砂)가 하얗게 빛나는 가운데 스스로 용호(龍虎)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안으로는 금어(金魚)의 물이 있고 위로는 관성(官星)이 몸을 이어 서로들 감싸 주고 있다. 안과 밖으로 명당(明堂)의 조건을 갖추고 있으니, 안으로는 큰 시내가 가로막아 차단해 주고 있고, 밖으로는 안산인 다섯 봉우리가 줄을 지어 점을 찍고 있다. 그리하여 물은 왕방(旺方 길한 방위)으로부터 흘러 내려오고, 용(龍 풍수에서 산을 가리키는 말임)이 밖에서 자물쇠를 잠그고 있어, 진기(眞氣)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고 있다.” 하였다. 그리고 항주(杭州) 사람인 두사충(杜思忠) 역시 이곳의 형국이 소찬후(蕭酇? 찬후는 한(漢) 나라 소하(蕭何)의 봉호임)의 선조의 묘역과 흡사하다고 하였다.
내 생각에도, 이 산에 형성된 언덕들이 너무도 많아 혈을 정하기가 매우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왕고(王考) 묘의 감혈만은 아름다운 요소가 모두 한군데에 모여 있어 길지(吉地)임을 가장 알기 쉽다고 여겨진다. 다만 그 혈의 위에 옛사람의 석곽(石槨)이 매장되어 있는데, 제작된 것이 요즈음의 제도와는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다. 그 석곽 앞에 쌍석(雙石)을 표지로 꽂아 놓았지만 거기에 새겨 놓은 문자가 하나도 없는데, 어떤 이는 이것이 신라(新羅)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사(李師 이의신을 가리킴)가 바로 그 위를 혈로 점찍으면서, 예전에 매장된 곳은 훼손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는데, 만약 그의 말대로 할 경우에는 점찍은 곳의 공간이 협소해서 하나의 봉분도 세울 수 없을 것 같기에, 그곳의 좌측 상면으로 자리를 옮겨 바로 산맥이 뻗어 내려오는 중앙에 위치하게 하고, 매장된 석곽은 섬돌 아래 우측 가에 있게 하였다. 이에 이사는 말하기를, “이곳은 점유혈(粘乳穴)에 해당되니 좌우로 물이 나뉜 것을 보면 분명히 알 수가 있다.”고 하였고, 박상의(朴尙義)는 금비형(金鎞?)이라고 하였고, 오사(吳師 오세준을 가리킴)는 “와중돌혈(窩中突穴)이니 모두 미심쩍은 느낌이 든다.”고 하였고, 또 어떤 이는 “이곳이 진룡(眞龍)의 정국(正局)이긴 하나 매장된 석곽을 피하려고 하다 보니 혈좌(穴坐)가 바르게 되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나, 나는 이를 개의치 않았다.
계축년(1613, 광해군 5) 상례 때에 내가 먼저 이곳을 쓰려고 하였으나, 술인(術人)이 “올해는 산가(山家)에서 묘운(墓運)을 불길하게 보고 있다. 내년에 한다면 괜찮다.”고 하였으므로, 이곳을 쓰지 않고 간방(艮方)의 언덕을 택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 오사는 말하기를, “이 언덕의 모습과 형세가 높고 중하며 안산(案山) 역시 예물을 바치며 전송하는 듯하니 대략 원래의 감혈과 서로 비슷한 점이 있고, 또 성법(星法)으로 헤아려 보더라도 길하다고 하겠다. 다만 좌비(左臂)에 해당되는 지점이 너무 낮은 흠이 있는데, 점차적으로 한두 자쯤 증축한다면 좋을 것이다.” 하였다.
처음에 이사가 이 산을 길지로 고른 다음에 잘 알고 지내는 재상(宰相)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었으므로, 장차 그 어버이를 이곳에 장사 지내려고 하였다. 그런데 아곡(鵶?)의 앞 마을에 박씨(朴氏)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10여 가호가 살고 있었는데, 고관의 위세에 눌릴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극력 저지하며 장사 지내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이때 마침 재상이 다른 술사(術士)를 시켜 다시 한 번 가서 살펴보게 하였는데, 그 술사는 평소부터 이사와 기예를 다투며 그를 헐뜯으려고 하였다.
그 술사가 이곳에 도착해서 박씨 마을에 머물러 묵으며 물어보기를, “이사가 점찍은 땅을 알고 있는가?” 하자, 박씨가 그 뜻을 알아채고는 말하기를, “바로 모처(某處)가 그곳이다. 하지만 우리가 조상 대대로 이곳에서 자손들이 모여 살고 있는데, 이 산이 여름철 장마 때만 되면 물이 샘처럼 뿜어 나와 질펀하게 넘쳐흐르곤 하는 것을 매번 보고 있다.” 하니, 술사가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고는 이튿날 산에 올라가서 푯대를 꼽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기를, “모산(某山) 너머에 물이 있는가?” 하였는데, 박씨가 있다고 하자, 술사가 “그 물이 흉한 기운을 내쏘고 있는 만큼, 이 지역이 비록 좋다고 하더라도 필시 수맥(水脈)이 있을 것이니, 한 자 정도만 파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런 사실을 보고하자, 재상이 결국은 이곳을 쓰지 않게 되었다.
그 뒤에도 이사가 경기(京畿) 안에 있는 풍수를 논할 적이면 반드시 이 산을 맨 먼저 꼽곤 하였으므로, 도성의 사대부들이 많이 이곳을 다시 찾아와서 살펴보곤 하였다. 그런데 그때마다 박씨가 그들을 마중 나와 말하기를, “당신이 어버이를 물속에다 장사 지내려고 한다면 이 혈에다 내려 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하였고, 모(某) 술사도 그렇게 말했으므로, 이런 말을 듣고서는 아무도 감히 그곳을 쓸 마음을 내지 못하였다.
그런데 나의 집이 그곳과 가까운 고을에 있는 데다가, 친하게 지내는 벗이 직접 답사를 한 일도 있었으므로,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환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풍수지리설에 대해서 조금은 알고 있었으므로, 성도(星圖)를 펼쳐 놓고 점검해 보니 본래 흉해서 꺼릴 만한 곳이 아니었다. 게다가 오사로 말하면 성법(星法)에 가장 정통해 있다고 할 만하였는데, 그 역시 길지(吉地)임에 틀림없다고 하였으므로, 내가 마침내 단안(斷案)을 내리고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그곳에 처음 찾아갔을 때, 박씨가 또 그런 말을 뇌까리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시험 삼아 한번 파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고는 두 개의 광중(壙中)을 파 보니, 토질이 딱딱하게 굳어 마치 비곗덩어리를 썰 듯 옥돌을 잘라 놓은 것 같았으며, 습기가 차서 축축하게 젖어 있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그리고 특히 왕고(王考)의 광중으로 말하면, 그 흙이 오색(五色)으로 찬란하게 빛나 마치 그림을 그려 놓은 것 같았으며, 또 석고(石膏)와 푸른 돌들을 얻기까지 하였으니, 아, 이 어찌 진짜 주인을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대저 풍수(風水)의 설이라는 것이 성인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긴 하나, 형세로 논한다면 그래도 채용할 만한 점이 있다고 할 것이니, 그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사람이 죽는 것을 싫어하다가 어쩔 수 없이 자기가 살던 집과 방과 울타리를 떠나 들판에 묻히게 된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라 하겠는가. 따라서 사람의 자식 된 자로서는 대략적으로나마 생전에 살던 집과 방과 울타리 비슷한 길지(吉地)를 하나 골라서 그 체백(體魄)을 편안하게 해 드려야 할 것이요, 그러면 자식 또한 조금은 위로받을 수가 있을 것이니, 이런 점에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점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가령 성신(星神)이 한 곳에 빛을 모아 비춰 준다는 설 같은 것은, 이치상으로 볼 때 결코 그럴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설을 주장하는 6, 7가(家)의 의견이 서로 상반되어 충돌을 빚고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망연(茫然)히 어떤 설을 따라야 할지 알 수 없게 하는 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이 여기에 구애를 받고 있으니, 이 어찌 잘못된 일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가령 전에 저 재상이 성법 같은 데에 얽매이지 않고 그 방도에 대해서 조금 이해를 하고 있었더라면, 어찌 무턱대고 술사에게 기만을 당할 리가 있었겠는가. 지금 산에 대해서 논한 문자를 대략 모아 놓는 기회에, 아울러 이에 대한 설을 써 놓음으로써, 뒤에 오는 자들이 취사(取捨)할 바를 알게끔 하는 바이다.>
-택당선생 별집 11권 계산지 산문-
택당 이식이 조부 묘터를 잡은 이야기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효를 중요시하였는데 부모 생전뿐만이 아니라 사후에도 좋은 자리에 묘를 쓰는 일도 효도라고 생각하고 실천했습니다.
<백아곡(白鵶?)은 경기 지평현(砥平縣) 동쪽 경계의 마산(馬山) 아래에 있다. 북쪽으로는 현의 소재지와 25리쯤 떨어져 있고, 동쪽으로는 관동(關東)의 원주(原州) 및 횡성(橫城)과 경계를 접하고 있으며, 서남쪽으로는 여강(驪江)과 30여 리 남짓 떨어져 있다.
지사(地師)인 이의신(李懿信)은 이 산에 대해서 논하기를, “형세가 용이 서린 것과 같고[蟠龍] 안산(案山)이 옥대(玉帶)와 같으며, 조용히 처녀가 들어앉은 듯한 가운데 형국(形局)이 야(也) 자를 이루고 있다. 감좌(坎坐)의 혈(穴) 하나가 가장 기걸찬데, 그 우측으로 두세 개의 지맥(支脈)도 모두 쓸 만하다.” 하였다.
[주]이의신(李懿信) :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술사(術士)이다. 광해군 4년(1612)에 한양(漢陽)의 지기(地氣)가 쇠했다면서 교하(交河)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여 왕의 허락을 받기까지 하였으나, 이정귀(李廷龜)와 이항복(李恒福) 등의 강력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광해군 6년에 합계(合啓)로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출처 : 택당집(한국고전번역원),정리 : 양평구비문학조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