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정배리

박재정

(朴再鼎)      고령박씨 입향조. 고양대군 박언성을 시관조로 하는 후손으로  선대는 경기도 평택시 청북면 옥길리에 세거하였다. 그 중에 고양대군의 19대손 尙文이 경기도 동두천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5형제를 두었는데, 차남인 재정이 서종면 정배리로 이주했다. 정배리는 재정의 5대조 농담 박세호가 1519년 기묘사화 때에 유거하던 곳이요 1541년 영월군수에서 물러나 은거하던 곳으로 再鼎의 입향과 관계가 있는 곳이다. 정배리 세거리에 농담이 […]

송상인

(宋象仁, 1569~1631)      조선의 문신. 자는 聖求, 호는 西郭, 본관은 礪山, 현감 宋復興의 아들이요 임진왜란 때에 순절한 동래부사 宋象賢의 아우다. 1569년 고부에서 출생하였다. 1605년(선조 3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 형조좌랑을 역임하고, 1612년(광해군 4) 김직재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직강, 지평을 역임하고,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이후 어사로 부임되고 이어 함경 평안도 지역 […]

박공현

(朴公鉉, 1848~1900)      한말의 유학자. 자는 國瑞, 호는 籠雲, 본관은 고령, 朴時亮의 아들이다. 묘소는 서종면 정배리에 있고 행장은 금계 이근원이 지었다. (서종면)

박우빈

(朴禹彬, 1870~1954)      유학자. 자는 舜執, 호는 嵋樵, 본관은 高靈, 朴永和의 아들로 1870년 8월 27일 서종면 정배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가정의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어느 날 소낙비가 쏟아져 소를 끌어다 맺더니 부친으로부터 ‘공부나 할 것이지 너보고 소 들여다 매라고 했느냐’ 하며 걱정을 들었다. 글방에서 종아리를 맞고 오면 부친은 회초리를 한 묶음 해다 선생에게 바쳤다고 […]

박만빈

(朴萬彬, 1868~1907)      항일의사. 자는 順和, 본관은 고령, 朴永元의 아들이다. 의사는 1868년 9월 8일 양평군 서종면 정배리 47번지에서 부친 朴永元과 모친 파평윤씨 사이에서 長男으로 출생하였다. 의사는 전하는 말에 의하면 포수였다고 한다. 1895년 명성황후가 弑害되고 또 단발령이 실시되어 강제로 백성들의 머리를 자르는 등 일본의 만행과 친일 주구들의 배신행위가 노골화되자 나라를 걱정하며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후기 […]

박중빈

(朴重彬, 1862~1906)      儒學者, 자는 用九, 본관은 高靈, 朴永鳳의 아들로 서종면 정배리에서 출생하여 숙부 朴永龍에게 입후하였다. 1903년 최익현 이근원 등이 화서 이항로의 추모사업을 위하여 강수계를 조직할 때에 참여하여 일금 25냥을 출연하였다. 또 1905년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평촌리 강수재(蓬山書齋)창건 당시에, 최익현 · 이우면 · 이근원 · 박인수 등 52명과 함께 통문에 참여하고 1906년 3월 강수재를 […]

박규장

(朴奎章, 1674~?)      조선조 문신. 자는 汝亨, 본관은 高靈, 朴昌基의 아들이요 정배리 입향조 재정의 손자가 된다. 관직은 가의대부 행동지중추부사로 묘소는 서종면 정배리에 있다. (서종면)

박사희

(朴姒?, 1918~1951)      효부. 현모양처. 본관은 고령, 유학자 楊西 박준빈(朴峻彬)의 장녀로 서종면 정배리에서 출생하였다. 모친 전주이씨는 교관 이승우의 딸이다. 1931년에 서종면 노문리 결성장씨인 張基德과 결혼하였다. 여사는 양서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여 성품이 온유하고 곧으며 예의에 어긋나는 일을 행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농담이나 웃는 일이 없었으며 말이 적고 조용하며 정신이 맑고 총명하여 선조의 이름이나 기일 등 지나간 […]

박세호

(朴世豪)      조선조 문신. 己卯名賢. 자는 居正, 호는 籠潭, 관향은 고령인데 창백리 朴處綸(1445~1502)의 아들이다. 이 때에 박세호는 성균관유생으로 이약수 · 윤언직 · 김수성 등과 더불어 유생 1천여 명을 주도해 인솔하여 광화문 밖에 모여 상소장을 올려 조광조 등의 억울함을 알리려고 하였으나 궐문을 지키고 있는 자에 의하여 통제되었다.   그러나 농담은 문지기를 밀치고 곧장 들어가 대궐 뜰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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